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33)

겨울 속을 함께 걸어가는 엄마와 딸

by 양콩

5년 전쯤 빌라 월세 광고를 보고 방문한 임여사는 튀는 외모의 60대 후반 사업가 포스인데, 딸 내외가 살 월셋집을 계약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딸 내외는 점잖고 예의 바른 젊은이들인데 웬일인지 유독 모친인 임여사에게만은 칼칼한 행동을 하고 말마다 무례했다.

속으로 딸을 잘못 키웠네... 예의가 없고 못됐네라고 생각했는데, 평소엔 누구에게나 당당하면서도 딸한테는 꼼짝 못 하는 임여사의 태도도 의아했다.

그런데 잔금 며칠을 앞두고 보증금 2000만 원밖에 안 되는 월세 잔금을 못 맞추는 사태가 났다.

딸 내외가 길거리에 나앉게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먼저 입주시키고 나머지 잔금은 돈이 마련되는 대로 주면 안 되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울먹이며 털어놓는 과거사를 듣고 나는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임여사는 전남편과 사별 후 딸과 아들을 데리고 현 남편과 재혼을 했다. 시동생과 시부모마저 한 집에서 부양을 하다가 데려온 자식과 시동생간에 싸움이 생겨 결국 아들이 자살을 하자 충격 먹은 딸이 가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수개월만에 가까스로 찾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장기간 심리치료를 통해 겨우 안정을 되찾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겨우 딸을 추슬러 결혼을 시켰는데... 사업하느라 딸명의를 빌려 쓰다 보니 딸도 신용불량, 본인도 신용불량... 그래도 포악한 남편 몰래 딸 이사 갈 집 월세 보증금 2000만 원을 만들다가 그만 700만 원 정도가 부족한 상태가 된 것이다.

딸이 그동안 엄마한테 냉랭하고 함부로 대했던 건 지난 과거사 속에서 엄마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고... 재혼한 시댁과 데려온 자식의 갈등 속에서 아들을 먼저 보낸 엄마가 딸에겐 얼마나 죄인 심정일지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다.

임대인을 설득해 보증금을 분납하게 하여 입주시켰는데... 그 이후로 두 번 더 이사 다녔지만 단 한 번도 중개보수는 받지 못했다. 늘 돈이 부족했으니까... 중개보수 왜 안 주냐 언제 줄 거냐 물은 적도 없었다. 우울한 과거사를 들은 순간 나는 이미 투항 상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달 전에 인근 아파트 급매가 나온 걸 보고 월세 사는 딸 안쓰러워 내 집 장만 해주고 싶다고 덜컥 계약했는데... 살던 집이 안 빠지는 거였다.

후순위 대출까지 받아도 돈이 1000만 원 부족한 상황...
살고 있는 집 임대인한테 3달치 월세를 미리 줄 테니 보증금 빼달라 사정사정해도 안되고, 보증금 반만 돌려받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해도 안 먹히고.

경제력 없이 빈둥거리는 재혼남은 혹시나 돈 생기면 딸 줄까 봐 날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임여사의 통장 입출금 내역을 조회한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 몰래 이일 저일 다해서 돈이 생기는 대로 현금으로 들고 와 내게 맡겼다.

어느 날은 20만 원, 어느 날은 77만 원... 이렇게 쌓인 돈이 잔금날인 어제 오전 11시에 750만 원이 되었고...
등기비와 선수관리금 등등 포함하면 약 500만 원이 부족한 상황...
장성한 딸과 사위는 10원 한 푼도 안 보태면서 엄마한테만 빨리 잔금 마련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젯 밤 늦게 전화로 ' 더 이상 못 구하겠다..' 훌쩍이는 전화를 받고 밤새 잠을 설쳤다. 혹시 잔금 못 맞춰서 나쁜 생각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돼서..

그래서 그 밤에 '아무 걱정 말고 아침에 사무실로 오라'는 문자를 보냈다.

조용히 불러 차용증을 내밀면서 이 돈을 언제까지 갚을 수 있냐 물었더니 '다음 주면 준다'라고... 그걸 어찌 믿겠는가 그래서

'12월 말까지 갚으라... 되도록 갚으라, 얼마라도 갚으라'라고 말했더니, 이자를 많이 주겠다 달란 대로 주겠다 하길래 이자는 필요 없고 이번에는 중개보수를 꼭 주세요 했더니 '당연하지!'라고 했다.

잔금이 끝난 후에 일어서 가려는 딸에게

"엄마가 이번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알지요?"

했더니 대답을 안 했다. 임여사는 혹시 딸이 토라질까 봐 눈을 꿈뻑꿈뻑거렸다.

그래도
"이런 엄마 없어요 엄마 은혜 언제 다 갚을 거예요? 갚아야지.." 했더니 딸이 허공을 응시한 채로

"갚아야지요 다 알아요.." 했다.

하늘은 온통 찬 구름으로 뒤덮였고 그 어느 사이로 미세먼지가 날아와 목을 간지럽히는 듯했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꽃피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자꾸 먼 산이 바라봐지던 12월의 마지막 주였다.

쉽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시끄러운 일만 많은 달이었지만, 위태롭게 살아가던 모녀가 모처럼 함께 웃으며 새집 비번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엉성했던 한 해가 완성되었다.

그들이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든, 더 이상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 계절에 상관없이 우리들의 마음을 시리게 하는 일도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