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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Feb 04. 2021

50만원 더 깎아드릴게요

착한 계약 착한 잔금

6개월 전 어느 화창한 주말에 해바라기 꽃 같은 모녀가 찾아왔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웃고 고개 돌려 나를 바라볼 때도 웃었다. 마치 어디선가 막 생일파티라도 치르고 온 사람들처럼 유쾌하게 한들거렸다.

나는 그들을 기억 못 했지만, 8년 전에 인근 아파트 1층에 월세로 계약해주었다고  했다.  그 집에서 여태 살았는데 임대인이 이사 들어오겠다고 하니, 집을 사서 안착하고 싶다고 했다. 대화를 하면서 재빨리 고객 명부를 찾아보니 낮은 보증금에 비싼 월세로 계약되어 있었다.

대출 가능 여부 등을 확인해주고 마침 바로 볼 수 있는 집이 있어서 딱 한 집을 보여주었더니 너무 만족해하며 사고 싶어 했다.


구매의사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물건의 흠결이나 부정적인 면을 먼저 찾아내는 경우가 많다. 부동산에는 '산 좋고 물 좋은 집은 없다'는  말이 진리다. 입지도 수리 상태도 모두 좋으면서 가격까지 착한 조건을 찾는 사람이 많은데 당연히 그런 물건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모녀는 저층인 데다 특별히 잘 수리된 집도 아닌데, 다른 집 볼 생각도 안 하고 너무 좋다 너무 좋다 노래를 불렀다. 마치 그 집을 살 목적으로 방문하기라도 한 듯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좋아하니 오히려 내가 다소 냉정해졌다. 며칠 밤 자면서 잘 생각해본 뒤 오라고 돌려보냈다.

모녀는 이틀 후 전화해서 마음 결정을 했다고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매도인에게 전화하여 계약 의사를 전달했더니  젊은 매도인이 잠시 머뭇머뭇하다 며칠 전 방문한 그 모녀냐고 물었다. 맞다고 했더니

" 50만 원 더 깎아드린다 하세요..."

경기도 외곽 서민아파트이고 20년 가까이 된 구축이라 매매가가 저렴한 편이다. 가격 실랑이해도 몇백만 원선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이 집은 당시 나온 매물 중 가장 저렴한 급매라서 매도인이 '가격 조정은 안된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기에 깎을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막상 계약하겠다고 하니 집을 보며 환하게 웃던 모녀가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자고 나니 몇억이 올랐니, 집값이 급등해서 변심한 매도인이 해제를 요구하니 하는 기사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그날, 계약시간을 잡는 중에 갑자기 500만 원도 아니고 50만 원을 더 깎아주겠다는 매도인의 제안에 나는 잠시 당황하고 잠시 주춤했다. 착한 잔금의 징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더 이상 못 깎는다 해서 그럴 줄 알았던 매수인은  매도인이 자발적으로 50만 원을 깎아주니 너무 좋았다. 하이톤으로 감격해마지 않더니  '50만 원을 깎아주었으니  웬만한 하자가 있어도 다 알아서 할게요!'라고 하지 않아도 될 맹세까지 했다.

며칠 후 계약시간에 맞춰 마주 앉았는데  매수인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쭈욱 월세 살다가  대출을 full로 받아서 사는 집이지만 내 집을 계약하게 됐다는 사실에 다소 흥분한 듯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줄줄줄줄 말을 이어갔다.

사회초년생인 20대 초반 딸이 엄마가 집을 사면 부족한 돈을 보태주겠다고 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좋은 집 팔아주셔서 고맙다고 틈만 나면 머리를 조아렸고, 집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다 알아서 고쳐 쓰겠다는 말을 수차례나 반복했다. 과할 정도로 흥분한 모습에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중개를 하면서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된다. 중개사는 양자가 있는 자리에서 매도인이나 매수인한테 치우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매도인한테는 그만하면 적당히 잘 받고 넘긴다는 분위기를 유지해주고, 매수인한테는 좋은 집 적당하게 잘 골라 산다는 기분이 들게 해야 한다. 어쨌거나 계약이 성사됐으니 이왕이면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뭔가 억울하거나 손해 본다는 느낌 없이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헤어지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수인이 무슨 선심이라도 하사 받은 것처럼,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좋아 어찌할 줄 모르니 나는 조금 뻘쭘했고 매도인은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너무 좋은 표를 내시네

한 달 후 매매 잔금일.
11시가 잔금 시간인데 출근도 안 한 9시부터 매수인이 사무실 앞에서 기다린다고 전화를 했다. 왜 벌써 오셨냐고, 매도인이 며칠 전부터 조금씩 짐을 뺀 것 같으니 가서 먼저 둘러보겠냐 했더니 거절했다.  전화로 양해 구해놓을 테니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가서 청소라도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도 사양했다.

"잔금도 치르기 전에  집을 둘러보고 청소하니 어쩌니 번거롭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중개를 하다 보면  잔금  며칠 전부터 짐을 몇 시에 빼느냐 청소하고 입주해야 하는데 빨리 좀 빼게 하라는 둥  재촉하고 성화인 분들이 의외로  많다. 반면 이렇게 중개사가 먼저 가서 둘러보고 청소하게 해주겠다고 해도 예의가 아니라고 거절하는 사람은 못 봤다.

서둘러 출근하니 매수인 모녀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살고 있는 집도 아직 짐이 덜 빠졌을 텐데  미리 청소도 안 할 거면서 왜 와 있었냐고 했더니, 내 집이 생긴다는 기쁨에 밤새 잠도 설치고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빨리 새 집에 가보고 싶어서 다른 건 손에 안 잡힌다고 했다.

매도인도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매도인은 짐을 전날에 미리 뺐다며 청소하라고 연락드릴까 하다 실례 같아서 못했다, 대신에 본인이 아침 일찍부터 청소를 해놓았다고 말했다. 둘이 서로  네가 고맙다 아니다 내가 더 고맙다...

잔금 정산을 하면서 매도인한테 도시가스 요금 정산내역서를 요구했더니
매수인이 바로 손사례를 쳤다.

매수인: 아 도시가스 요금은 그냥 놔두세요!
매도인: 네?
매수인: 50만 원이나 깎아주셨으니 너무 고마워서 저희가 뭐라도 내드리고 싶어서요.  그러니 공과금 같은 거 놔두세요.  제가 낼게요..

매도인은 매수인을 한번 쳐다보더니 말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납부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산을 끝내고 매도인과 매수인이 함께 집을 보러 갔다 오더니 매수인 얼굴이 더 밝아졌다.

집을 깨끗이 써주셔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짐을 뺀 모습을 보니 더 기분이 좋아졌어요.

보통은 아무리 깨끗한 집도 짐을 빼고 나면 엉성해 보이고 수리해야 할 흠집이 눈에 띄기 마련이다. 중개업 18년 하면서 짐을 빼고 나니 집이 더 좋더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매수인은 그랬다.


사실 집값 깎아줬다고 웬만한 하자 넘어가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가격 흥정할 때야 진심 그럴 생각이었더라도 잔금날은 매의 눈으로 훑어보고 냉정한 계산가처럼 수리 및 변상을 요구한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는 그 평범한 진리가 중개 현장에도 적용된다. 연식이 오래된 아파트일수록 잔금날 분쟁이 많아서  중개사들은 긴장하기 마련인데, 매도인의 자발적  '50만원 감액'은 모든 통상적 현상을 물거품처럼 날려버렸다.


 매도인한테 '집 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좋아하고 긍정적인 매수인 처음 본다. 이렇게 좋아하는 분한테 집을 파신 매도인 분도 복 받으실 거다'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그래서 가전제품 중 매수인이 원하는 것은 몇 개 두고 가고 집도 깨끗이 청소를 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는 지극히 평범한 속담이 생각나는 광경이었다.

둘이 서로 덕담을 나눈 후 인사를 꾸벅꾸벅 몇 번씩이나 한 후에 매도인이 돌아서 가려하는데, 매수인이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기요!   혹시 나중에라도 무슨 문제가 있으면 연락.."
???
어? 매도인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야 여태 좋다더니 잔금도 끝난 마당에 나중에 문제 생기면 연락한다고?' 


매도인도 나도 동시에 의아한 표정으로 매수인을 쳐다보았다. 매수인은 예의 그 해바라기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문제가 있으면 연락... 주세요~~ 언제든지요~ 언제든지 얼마든지 연락 주세요~! "

집 팔고 나간 매도인이 문제 생겨서 매수인한테 연락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중개를 하면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많이 가진 사람들이  참 부럽다. 돈이나 집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긍정적인 품성과 여유를  여기저기 장착한 사람들 말이다. 천국과 지옥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데  가치 기준이나 기대가 끝없이 높아 평생을 가도 만족하지 못하면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가끔 나보다 돈 잘 버는 사람, 눈만 뜨면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을 가진 사람이 너무 부러워서 잠을 설칠 때도 있지만,  평생 월세집을 전전하다 딸 도움을 받아 마련한 초라한 집 한 채에도 만족하며 감사해하는 그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돈 많은 사람은 부럽긴 해도 고개가 숙여지진 않는데 말이다.

이런 분들이 이사를 하는 날엔 '이분 부자 되게 해 주세요!'라고 중얼중얼 기도를 게 된다. 물론 이런 자발적 헌사도 '그분들' 께는 실례가 될 수 있다.  루소 말처럼 욕망이 적을수록 인생이 행복한 거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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