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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Oct 01. 2021

일만 하면서 살고 있나요?



80대 할아버지가 팩스좀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보험회사에 보낼 진료비 영수증이었다.  신분증도 함께 카피해서 팩스로 넣고 있는데  할아버지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응 문구점이 문 닫아서 복덕방에서 넣고 있어. 금방 갈게.  사랑해애~"

사랑해애~

팩스가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방금, 혹시 방금 사랑해~라고 하신 거예요?"

"그랬지."

"진짜요? 누구한테요?"

"우리 마누라지!"

할머니는 우리 사무실에 자주 들르셨지만 할아버지가 혼자 오신 건 처음이었다.  나는 팩스고 뭐고 이 신기한 사랑꾼 할아버지에게 온통 관심이 쏠렸다.

"진짜 할머니께 사랑해라고 하신 거예요? 진짜예요?"

"진짜지 그럼. 뭐가 잘못 됐소?  나는 항상 전화 통화할 때나 집에서 나올 때 들어올 때는 사랑해 라고 말하는데..."

아니요. 너무 멋지세요~  

나는 물개 박수를 보내드렸다.  






2년 후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오늘,  할머니가 진료비 영수증을 들고 오셔서 팩스좀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팩스를 보내다 문득 2년 전에 '사랑해애~' 라고 말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영감이 사랑해 라는 말을 달고 살아서 주책이다 했어. 조금 더 시간 지나니 그냥 습관인가부다 했어.  그런데 영감이 먼저 가고 하루 종일 사람 소리 안 나는 집에 혼자 있으니까  사랑해 라고 지겹도록 해줬던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기운이 생겨. 그때는 몰랐지. 참 늦게 깨달았지."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사업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였고 그 이후로 할머니가 밥벌이로 나섰다. 이 아파트에 이사 온 뒤로도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사무실 옆을 지나갔다.

실제로 무거운 배낭을 멘 할머니가 아픈 다리를 끌듯 걸으며 힘겹게 사무실 옆을 지나시면 나는 


"가방 좀 가볍게 하고 다니세요  걷기도 힘들어 보이시는데"


하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몸이 아플 때도 나는 항상 일했었어.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어. 하나는 요양보호사, 하나는 아파트 청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전에는 아파트 청소가 주업이었지."


할머니는 몇 개월 전 다리 통증이 너무 심해서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 아파트 청소는 계단 오르 내리기가 힘들어 그만두었지만, 요양보호사는 '나이가 많아서 부담스러워' 하는 바람에 직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내 인생을 생각하면 일하던 것밖에 생각이 안 나. 몸이 아플 때도 항상 일했었어.  그러다  너무 아파서 치료받고 이제 다 나았는데 일을 안 하고 있으니 너무 이상해.  몸이 아플 때도 일했었는데,  멀쩡한데 쉬고 있다니 이상하잖아, '


오렌지 주스를 따서 드리니 미안해하며 받아마셨다.


"평생 일 많이 하셨으니 이제 편하게 쉬실 때도 되었어요. 일 안 하니 허전하다 생각지 마시고 즐겁게 놀러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찾아드시고 그렇게 보내셔야죠"


할머니는 머뭇머뭇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동안 모아둔 돈을 자식들 사업한다 해서 보내주었는데, 주머니에 여유돈이 없으니 불안하다고 했다.  돈을 가져간 자식한테  매달 용돈을 좀 보내달라 했더니. '코로나로 사업이 힘드니 몇 개월만 좀 참아달라'라고 했단다.


"자식이 힘들다는데 어떻게 돈을 달라고 해.  우리 영감이  젊어서 사고 치고 돈 다 까먹었을 때도 아침마다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었어. 영감이 '안 쓰더라도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힘이 난다'라고 노래를 불렀거든. 왜 그랬는지 이제 알겠어. 혼자 있으니 영감이 하던 말들이 모두 생각 나."


나도 다시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눈이 붉어지더니 옷소매로 눈을 가렸다.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거렸다.


"미안해요, 내가 딸 같아서 자주 신세 졌는데 오늘은 또 별소릴 다 했네. 딸이 바빠서 만날 시간도 통화할 시간도 없어서,,,"


할머니가 가셨다.

인기척 없는 빈집으로 돌아가는 부모님들. 아니 항상 혼자 먹고 혼자 자고 혼자 앉아있는 어르신들. 그래서 어느 날은 뼈 빠지게 일만 하던 그런 날마저도 그리운 시절이 되는 모양이다.


"혼자 어두운 방에 가만히 앉아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면  정말 일하던 생각밖에 안 나.  눈만 뜨면 일만 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늙었다고 일을 못하게 되니까 그것도 이상해"


우리가 훗날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어떤 날들이 가장 많이 생각날까.


죽어라 일만 하고 살았다고 회상하게 될까?


'일 하던' 생각밖에 안 날 정도로 열심히 일했어도, 쓸쓸한 노년을 거부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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