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그릇의 셀프변호
요즘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서, 동생한테 살기 참 힘들다는 하소연을 했다. 한참 듣던 동생이 나보고 다 잘 될 것이라면서 아주 그릇이 크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릇이 크다고? 그 말이 어딘가 우스워서 나는 그릇이 크지는 않은데 작은 코렐 그릇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가볍고, 잘 깨지지 않고, 식기세척기에도 딱 맞게 들어가고, 어느 가정에서나 활약한다. 코렐 소리를 듣고 엄청 웃겨하는 동생에게, 너는 꼭 빌레로이 앤 보흐 뉴웨이브 커피잔 같다고 했다. 아무 무늬도 없는 흰 컵인데도 곡선이 너무 아름답고, 모양이 특이해서 수납이 좀 어렵지만 정말 품격 있게 빛난다.
우리는 늘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관대하고, 포용력 있고, 베풀 줄 알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크게 볼 줄 알고, 아무튼 뭐든지 대단한 사람에게 ‘그릇이 크다’라고 칭찬을 한다. 그냥 관용어로 쓰이는 말이다 보니 누가 그 말을 처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엌일을 안 해본 사람임은 분명하다. 큰 그릇은 많이 담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다. 무거워서 잘 깨지고, 세척하기도 어렵고, 큰 그릇에 담은 음식도 결국 작은 그릇에 나눠 먹어야 해서 설거지거리만 늘리는 셈이다. 물론 부엌일을 안 해본 사람이 만든 말일 테니 그렇게 그릇의 쓸모까지 생각해보진 않았을 것이다.
큰 그릇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사람은 되려 냉소주의에 빠진다. “나는 더 큰 일을 할 사람이야.”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소홀히 하고, “너 같은 사람과는 못 어울리겠어.”라며 주변 사람들을 무시한다. 유독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불평만 많이 하는 사람들이 그릇 사이즈에 집착할 때가 많다. “우리 상사는 나를 담기엔 너무 작은 그릇이야”, “내 애인은 나를 감당하기엔 너무 작은 그릇이야” 같은 말을 늘 달고 산다. 스스로 뭔가 해볼 생각은 안 하고 주변의 그릇 사이즈만 탓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소홀히 하고 남 탓만 하는 사람은 큰 그릇은커녕 1회용 그릇도 되지 못한다.
큰 그릇이 되라는 말로 남의 고통과 아픔을 짓밟기도 한다. 흔히 자신보다 어리거나 아랫사람의 희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려고 할 때 ‘큰 그릇이 되려면 이런 건 참고 견뎌야지’라고 얼버무리곤 한다. 큰 그릇이 되려면 대범해져야 한다면서 남의 아픈 감정을 소홀히 여기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말라면서 남의 희생을 무시한다. 고통과 아픔을 모른 척하고 견뎌낸다고 해서 큰 그릇이 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저런 말로 남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사람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행히도(?) 나는 내가 그렇게 큰 그릇은 못 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그냥 내가 담을 수 있는 것과 나의 쓸모에 충실하기로 했다. 나는 정말로 코렐 그릇 같은 사람이다. 고급 레스토랑에는 안 어울리겠지만, 모든 가정집에는 다 어울린다. 전자레인지에도 돌릴 수 있고, 세척기에도 잘 들어간다. 떨어뜨려도 잘 안 깨질 정도로 단단한 내구성을 자랑하면서도 가볍다. 끝에 살짝 곡선이 있어서 손에서 잘 놓치지도 않는다. 엄청 예쁘게 생긴 그릇은 아니지만 군더더기가 없다.
모든 사람이 큰 그릇이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다 큰 그릇이면 그때는 아마 또 더 큰 그릇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큰 그릇에 간장을 담고, 더 큰 그릇에 밥을 담고, 그보다 더 큰 그릇에 국을 담는 걸 상상만 해도 설거지가 아찔하다. 세상엔 정말 많은 종류의 그릇이 있다.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그릇은 각자 나름의 쓸모가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각자의 삶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큰 그릇이 되는 것에 집착하기보다 어떤 그릇이 되어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고민하면 삶이 더 즐거울 것 같다.
브런치를 하다 보니 원고 청탁을 받게 되는 기쁜 일도 있네요. 월간 에세이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잡지'라는 취지에 맞게 원고료는 좋은 마음으로 지파운데이션의 청소년 생리대 후원 분야에 기부하였습니다(https://donation.gfound.org/bbs/board.php?bo_table=support_1&wr_id=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