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양화 Dec 13. 2021

나는 비행기 공포증입니다 (1화)


“Y 있잖아,  드디어 2 만에 일본에 들어가. 내년(2022 ) 1 2 비행기 예약했어..... 7 만에 비행기를 탄다고!!”

일본에 사는 내 단짝 친구 Y는 이 말을 듣고 “그럼 우리 오랜만에 볼 수 있겠네”하면서 좋아한다. 그렇다 난 드디어 일본에 들어간다. 배가 아니라 비행기로!! 비행기를 타고요!!


비행기 공포증의 내가 약 한 달 후의 일본행 티켓을 예약할 때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다. 나는 이 글을 공포증 극복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적는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점에서 아직 공포증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비행기 예약을 했을 뿐, 극복을 위해 자신과 맞보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나에게는 독자분들의 응원이 필요하다. 비행기를 아무렇지 않게 탈 수 있는 분들에게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웃으면서 성원을 보내주시길 , 그리고 나처럼 비행기 타기가 귀신 만나는 것보다 무서운 분들에게는 작게나마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


여권을 보니 지금까지의 기록이 다 남아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방학마다 꼬박꼬박 진정에 갔다. 태어나 자란 일본을 떠나 한국에서 혼자 육아를 하는 나에게 진정은 오아시스였다. (정확히 말하면 4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남편은 주말에만 얼굴을 볼 수 있는 회사원이다. 약 10년 전 하루 종일 혼자 육아를 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날들이 떠오른다. 둘째를 낳고 몸이 많이 아팠다. 생각도 못한 난치병(류마티스관절염)을 앓았던 것도 그 시기다. 온몸의 간절히 이팠다. 일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진단을 내렸다. 출구가 없는 어둡고 깜깜한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아이들 밥 지어주기, 갈아 입하기, 씻기기 조차 어려울 정도의 통증이었다. 특히 경직된 손가락을 쓰기 힘들었다. ‘바람이 닿아도 아프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라지 않을까 싶다. 유마티스 통증으로 겪는 고통에 비하면 아이를 낳는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다. 암튼 증상이 없는 지금 그 아픔을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하다.


남편과의 달콤한 러브스토리 드라마에 출연 중인 내가 엄마가 되니 갑자기 비극의 주인공으로 되어버린 셈이다.

“감독님!! 왜 그러세요? 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 내 캐릭터를 잘 못 보셨네요. 난 항상 밝은 미소를 뛰우고 천진난만한 사람이에요!! 비극은 전혀 안 어울린다고요!!”


억울하게 비극의 주인공으로 변신한 나는 그런 몸 상태로 매번 힘겹게 비행기를 올랐다. 한 아이를 업고 한 아이 손을 잡고 남은 손으로 캐리어를 밀었다. 아이를 가진 세상 엄마들이 다 그렇듯 나 보다 우선 아이를 돌봤다. 화장실 가고픈 마음 꾹 참아 아이 기저귀를 갈았다. 모유수유 끝난 뒤에야 마음 놓고 밥을 먹었다.


반나절 걸리고 진정 집에 도착해 한발 들어간 순간 긴장의 실이 툭 끊어져 기절하듯 잠잤다. 수면제라도 먹듯이 자도 자도 잘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1년 굶은 사람처럼 엄마 요리를 마구마구 먹었다. 그래서인지 매번 일본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면 많은 친구들이  “양화 씨~ 얼굴 좋아졌네, 좀 살도 지고”라 말해줄 정도로, 한국 엄마들이 보는 나는 헐쭉했었던 것이다.


신정은 일본에서 진정 식구들과 보내고 구정은 한국에서 시댁 식구들이랑 보냈다. 추석도 마찬가지다. 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명절을 보내는 한국문화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결혼생활을 한지 어느덧 4년이 지났다. 그동안 조금씩 , 아주아주 조금씩 커진 장체 모르는 불안전한 감정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들 방학이 다가온다. 어쩐지 비행기 탈 생각만 하면 불안해진다. 왠지 비행기가 떨어질 것만 같고 그토록 기다리던 진정 방문이 우울해지지 않는가.

어느 날 비행기표를 끊는 남편하게

 

“앞으로는 비행기가 아니라 페리로 예약해줘!!”

내 입에서 이 말이 툭 튀어나왔다.

“비행기가 편하지 않아?!”

“아니... 페리로 갈 거야”

“그래?! 알았어... 애들이 힘들 텐데...”


갑자기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 와이프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 건드리면 큰 일 나는 것 아는 착한 남편이다. 예약이 비행기로부터 페리로 쉽게 바뀌어졌다. 이것이 내 비행기 공포증의 시작이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의 일이다.


여권을 보니 마지막 비행기 탑승은 일본행 2014년 5월 15일. 그 후로는 철저히 페리로 왔다 갔다 했다. 결국 약 8년 동안 난 비행기를 안 탄 셈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타고 싶어도 못 탔다고 표현해야 하겠지.


부산 살이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유 중 하나는 부산항이 있어서다. 부산항에서 고속 페리를 타면 3시간(츠시마 경유 3시간 반) 뒤에 하카타항에 도착한다. 내가 태어나 자란 효고현 히메지시는 하카타에서 신칸센을 타고 3시간. 혼자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도 비행기 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페리로 일본을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을 들으면 거의 90% 지인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질문했다.

“양화 씨 왜 비행기로 안 가요? 배는 멀미 안 해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심장이  철렁.

“비행기 공포층이 있어서...”

대답은 항상 그랬다. 그러자

“어마~진짜로??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나는 배가 더 무서운데.. 비행기가 사고할 확률이 자동차사고 보다 더 낮아요.”


다 아는 말이다.... 확률 이야기도 수 백번 들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무서운데 어찌하면 좋은가. 이제는 이륙하는 그 순간을 상상만 하면 식은 땀이 나온다. 심장이 덜컹털컹, 맵박이 빨라진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해외여행도 ‘비행기’란 조건 아래 다 포기했다.


시댁 식구들이랑 4 가족이 일본 여행을 갈 때조차 일본에서 집합을 요구하는 며느리를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말씀은 안 하셨지 ‘별난 며느리’ 그 자체다.페리를 타고 온 며느리와 비행기 타 온 식구들이 후쿠오카공항에서 만나는 기이한 일을 일으킨 장본인이기에 너무 미안한 나머지 일본 관광안내를 정성껏 해드렸다.


한국에 들어갈 때는 더 이상했다. 시댁 식구들을 후쿠오카 항공에까지 대려다 드리고 인사를 한 뒤에 우리 식구만 페리 타는 항구로 향했다. 결국 따로따로 돌아갔다. 불쌍한 내 남편은 와이프와 시댁 식구 중간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글을 읽는 남편에게 지금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비행기를 한 번도 안 탔나? NO다. 결혼하기 전에는 가족이나 친구들이랑 비행기로 일본 오키나와, 홋카이도는 물론 한국, 인도네시아, 이탈리까지 갔다. 남편과의 신혼여행도 하와이였다. 신기하게도 그 당시는 괜찮았다.


더구나 내 어릴 적  한 때는 꿈이 ‘스튜와데스’가 아니었던가?! 세계 곳곳을 멋지게 여행 다니고 싶은 그런 꿈이 나에게도 있었다. 과연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정말 동일인물일까? 세월의 흐름은 그런 의미에서 참 신기하면서 잔인하다.


결혼, 육아를 경험한 이후 꿈 이루기보다 불안으로 몸을 펄펄 떨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실감하는 것이 중년의 숙명인 걸까. 그렇다면 너무 실망스럽다. 그래서 아니라고 믿으니까 이 글을 쓸려고 한다.


“왜 나는 비행기 공포층에 걸렸을까? “


사실 이 문제는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는. 부산항이라는 강력한 내 편이 있어서다. 그러나 2년 전  항상 내 편에 있던 부산항, 정확히 말하면 고속페리가 갑자기 결항을 해야 할 상황이 터졌다. 그 이유는 바로 코로나다. “조금 참으면 괜찮아지겠지?!”이렇게 1년이 지나 이제 2년이 지나려고 한다.


재일 교포 3세는 어디까지나 외국인, ‘재입국 허가’란 제도하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 기간은 2년이다. 2년이 지나면 나랑 애들 둘의 특별 영주권이 실효가 된다.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됐다. 나는 공포증이 생긴 후 드디어 이 질문과 대면을 해야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당당히 물어보았다.


“왜 나는 비행기 공포증에 걸렸을까? “


2화로 계속됨











작가의 이전글 너희 엄마 일본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