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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수 May 08. 2021

고소공포증

등을 미는 힘과 구르는 바퀴소리가 심장을 뛰게 한다. 무릎 아래로 덮인 담요는 발바닥까지는 따뜻함을 챙겨주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앉은 채로 뒤돌아 나를 보는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면에 보이는 무대 위에서 환하게 나를 보며 웃는 깔끔한 차림의 남자를 응시하며 무대와 가까워졌다. 무대에 오르니 아까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무대에 있던 남자를 쳐보다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가 준 돈은 나를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배우다. 연극 무대에 간간이 서는 배우. 경력은 오래됐지만 마땅한 작품이 없다. 그래도 여기저기 발을 뻗어 놓은 덕분에 밥은 벌어먹고 살았다. 지인의 소개로 좀 색다른 연기를 해보는 게 어떨지 제안이 들어왔다. 실험작에도 관심이 많아 동의했고 페이도 높게 쳐줬다. 미팅을 가지면서 이 남자를 만났다.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속이 비어 보였다. 미팅을 하면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돈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이번에 보고 영영 하지 않을 일이라 눈 딱 감고 하기로 했다. 맡은 역할은 장애인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관객이 아닌 신도. 나는 그들 앞에서 이 남자가 행하는 기적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 기적이란 돈이다. 돈으로 나는 장애인이 됐고 돈으로 일으켜졌다. 돈이 있기에 암도 치료할 수 있고 돈이 있으면 몇 시간 안에 아주 먼 곳까지 갈 수 있다. 나는 그 돈이 필요했다. 언제 밥줄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다. 노후도 준비해야 하고 결혼도 하고 싶다. 늦은 나이지만 10년 동안 연애를 한 애인이 있어 먼저 준비하고 청혼하고 싶었다. 인생을 걸만큼 이번에 큰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리다 보면 나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테니 웬만한 일들은 다 해야 한다. 무대를 오르는 계단이 낮았다. 나도 모르게 일어서 걸어 올라갈 뻔했지만 옆으로 재빠르게 온 남자 둘이 내가 탄 휠체어를 들어 무대 위로 옮겨줬다. 신도들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대부분 오십 대에서 육십대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간간히 젊은 사람들도 보였는데 비율이 확실히 적었다. 목사는 나에 대해 소개했다. 내가 아닌 나였다. 신도들은 믿습니다라는 말을 연달아 외쳤다. 드디어 나의 연기를 보여줄 차례다. 오랜 기간 갈고 닦아온 연기 실력을. 누가 보면 휠체어에서 간단하게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짧은 가동범위 안에서도 최대한의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없던 근육이 살아나는 듯한 움직임, 동시에 나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여줘야 한다. 휠체어에 달린 팔 받침대를 움켜쥐었다. 오랜 시간 앉아있던 탓인지 다리가 저려 일어서 지지 않았다. 무대에 있던 그 남자는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자신 또한 믿음으로 무장된 얼굴로 바뀌었다. 한쪽으로 무게가 쏠려 휠체어가 쓰러졌다. 나는 굴렀고 무대 아래로 떨어졌다. 짧게 공기를 머금는 소리가 들렸고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아픔을 참고 일단 상체를 먼저 세웠다. 한쪽 다리를 끌어 지면을 밀어 일어났고 다른 다리로 몸 전체의 무게를 받쳐냈다. 환호성이 들렸다. 뭐랄까. 성취감과 동시에 감동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이런 환호성을 들어 본 적 없다. 진심이다. 모두가 내가 되길 원하는 진심으로.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다시 한번 더 추락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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