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줄기인 고구마순은 여름철 뛰어난 식재료다. 데친 뒤 나물처럼 무치거나 김치를 담아서 먹어도 좋고, 볶음으로 만들어도 꿀맛이다. 식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아삭해서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열량이 낮고 식이섬유가 풍부해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한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껍질을 까기 힘들다는 것이다. 보라색 껍질이 한 번에 제거되지 않아서 줄기 하나하나를 들고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리고 한 단을 사면 양이 많아 보이지만, 데침과 동시에 푹 줄어들기 때문에 두세 단은 사야 먹을 양이 나온다. 그래서 반찬을 만들기까지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먹는 건 순식간이니 요즘 말로 하면 가성비가 떨어진다고나 할까? 물론 고구마순 그 자체는 비싸지 않지만 말이다.
오늘 오후 친정집에 갔더니 엄마가 고구마순을 사놓으셨더라.평소에 손이 크신 분인지라 고구마순이 무려 4단이나 쌓여 있었다. 반찬으로 만들려고 손질을 하신단다. 나는 순간 속으로 외쳤다.
'앗 타이밍 잘못 맞춰 왔다.'
아무래도 엄마와 같이 고구마순 껍질을 같이 까야할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했다. 이대로 다시 줄행랑을 칠 수도 없고... 껍질을 까자니 귀찮음이 몰려왔다.
결국 엄마혼자 손질을 하도록 하고 나는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어서 바닥에 앉아 고구마순을 집어 들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뚝딱뚝딱 줄기를 꺾으며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손 끝과 손톱은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작업을 거친 초록빛 줄기가 소쿠리에 쌓여갔다. 이 부드럽고 싱싱한 속살이 나중에 반찬이 되어 우리가 맛있게 먹을 생각에 기분도 좋아졌다. 그렇게 꽤 많이 손질을 한 것 같았는데... 한 단 밖에 줄지 않았다. 오 마이 갓. 슬슬 무릎이 아파왔다. 다시 귀찮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 엄마는 외치셨다.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못 해 먹겠다. 저리 치워두고 나중에 해야지. 너도 일어서!"
엄마의 포기 선언이었다. 고구마 줄기와의 잠정적 휴정 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나는 속으로 너무 신이 났다. 그래서 손을 씻고 곧장 소파로 직행해서 널브러졌다.하지만 '우리 엄마도 예전 같지 않구나' 싶어서 세월의 무색함도 느껴졌다. 몇 년 전의 엄마는 앉은자리에서 뚝딱 껍질 까기를 마치셨기 때문이다. 하긴 젊은 나도 무릎이 아픈데 할머니가 된 엄마는 오죽하셨겠나 싶다.
정성이 들어간 모든 음식이 그렇긴 하겠지만, 한식 밥상은 특히나 손이 가는 요리들이 많다. 나물이며 김치며 건강한 식재료들이 밥상에 올라오기까지 많은 수고로움을 거쳐야 한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이 모든 과정을 거의 엄마 혼자 소화했으니... 문득 미안함이 느껴졌다. 오늘 내가 조금이라도 손질을 해놓지 않았으면 엄마 혼자 다 했을 생각에 아찔함도 들었다. '이왕 깐 김에 두 단은 했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몰려왔다.
나중에 고구마순이 반찬으로 올라오면 우선 감사와 경의부터 표해야겠다. 그리고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모든 음식을 감사히 맛있게 잘 먹을 생각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요리에 소질이 없어서 음식을 만들기보다는 주로 먹는 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맛 품평보다는 감사함으로 가득한 식사로 배를 불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