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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혜영 Dec 12. 2016

나로 살아가기

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스무살에 황금색 에펠탑모형을 받았다. 막 파리여행에서 돌아온 친구의 선물이었다. 일 년 동안 아르바이트한 돈을 다 털어 다녀오는 바람에 거지가 됐다면서도 친구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의 깊은 눈동자 안에서 반짝이던 세느강의 안개, 몽마르트 언덕의 화가. 에펠탑의 야경은 내게 ‘파리여행’이라는 꿈을 안겨 주었다. 

이십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직 파리에 가지 못했지만, 내게 프랑스의 파리는 그런 곳이다. 첫 일탈을 꿈 꾼 도시. 가슴에 깊이 새긴 황금빛 탑이 있는 장소, 기다리는 이가 없어도 꼭 한 번 가야할 곳......브릿마리에게 파리는 어떤 의미일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브릿을 유일하게 사랑한 언니가 죽고, 대신 죽었어야 할 삶을 사는 것처럼 브릿은 집안에 갇혀 지낸다. 음습하고 무거운 적막이 감도는 집 안에서 말을 꺼낼 수도 소리 내 웃을 수도 없는 일이 얼마나 사람의 심장을 조이고 아리게 하는 것인지 소중한 이를 잃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깜깜한 벽장 같은 집에서 어린 브릿이 할 수 있는 것은 집안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아무도 브릿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청소를 하고, 식기를 정돈하고, 집안을 청결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부모님께 그녀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끝내 브릿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곁을 떠났다. 그렇게 모두 떠나고 혼자가 되었을 때, 켄트를 만났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켄트를 보며 브릿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행복했다. 브릿은 그를 위해 집을 꾸미고, 아이를 키우고, 청소를 하며 매일 발코니에서 귀가하는 그를 기다렸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로 시작해서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발코니에서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남편의 셔츠에 낯선 향수가 배면서 사랑에 대한 환상은 깨지게 마련이다. 환상에서 깨어나니 거울 속에서 흰머리가 성성한 노파가 뾰족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대로 지내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한참 지나 썩은 뒤에야 이웃에게 발견되는 외롭고 초라한 할머니. 그 광경이 끔직해 브릿은 40년 만에 일을 가지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세상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바뀌었지만, 더 늦기 전에.     


나로 살아간다는 것


브릿의 새 직장이 있는 보르그는 무척 작은 곳이었다. 어른들은 도시로 다 떠나버린, 할 일없는 노인과 어린 아이들만 남아 있는 죽은 동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브릿마리는 참담하고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진흙탕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드나드는 레크리에이션센터를 관리해야 한다니. 결벽증에 모든 것이 완벽히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녀에겐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곳에서는 정말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 작고 보잘것없는 동네가 브릿에게 새로운 삶을 가르쳐준다. 브릿은 그곳에서 난생 처음 가구를 조립하고, 축구공을 차고, 술을 마시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하나씩 익혀 나간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인생은 갑자기 날아온 돌에 맞는 것이라고. 브릿이 남편의 배신이라는 돌에 맞지 않았다면 보르그에 가지 않았을 거고, 그곳에서 축구공에 맞지 않았다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작은 늘 그렇듯 모든 것이 무너진 다음에 이루어진다. 60년을 넘게 쌓은 그녀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뒤 보르그를 지난 지금, 그녀는 전혀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길목에 서 있다. 하나는 집으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적 꿈인 파리로 향하는 길이다. 

과연, 브릿마리는 어느 길을 택할까?          


"사랑이 언제 꽃을 피우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어느날 눈을 떠보면 꽃이 만개해 있으니까.

시들때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보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발코니 식물과 상당히 비슷하다. 

가끔은 과탄산소다로도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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