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다에 고이는 시간
바람이 달라졌다. 한낮에 여전히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지만, 아침저녁 살갗에 닿는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풍겼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야 늘 예고없이 불쑥 일었지만, 떠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독립후 처음 맞는 주말, 이른 아침부터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배낭 안에는 커피와 간식 그리고 수건 한 장이 전부다. 기분낸답시고 도시락을 싸고, 사진기나 수첩 같은 것을 준비하다가는 출발하기 전에 기운이 빠질 수 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을 때, 바로 일어나야 한다. 부족하면 어떻고, 못 챙기면 또 어떤가? 집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이 주말도 집에서 뒹굴거릴 게 뻔하다.
그리 머지 않은 해변으로 정했다. 피서객들이 사라진 가을 해변은 여름보다 더 아름답다.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어 한톤 짙어진 물빛을 마주하면, 절로 가슴이 트인다. 높고 푸르러진 하늘과 맞닿아 수평선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바지를 주섬주섬 걷어올려 바다 안으로 들어간다. 따뜻하다. 차갑지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의 온도가 사람의 체온처럼 발전체를 감싸안는다.
가을 해변은 혼자여야 좋다. 물장구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찬 여름 해변에선 혼자 걷는 일이 청승맞지만, 가을 해변은 혼자 걸어야 제맛이다. 물기 어린 모래 사장위에 꾹꾹 새겨지는 발자국을 들여다보거나, 속살이 빠져나간 소라껍데기를 줍고, 작은 그늘에 앉아 캔맥주나 커피를 들이키는 모든 것이 혼자일 때 편안하다.
웃음기를 걷어낸 파도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것도 가을 바다가 주는 선물이다. 가득 메웠던 것을 비워낸 해변은 한층 더 아름다워진다.
그 안에 머무는 것만큼 고요하고 깊은 시간이 또 있을까?
이른 오전에 도착한 바다에서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하다 어느덧 오후의 끝물에 닿는다. 머리 위를 달구던 태양이 수면으로 내려오면서 화려한 노을을 빚어낸다.
어느때부터인가 노을을 보면 ‘산화’란 단어가 떠올랐다. 시커먼 재로 남아도 좋을 만큼 완전히 태우는 산화가 꼭 지나온 사랑인 것만 같아서다.
노을이 완전히 잠기기 전, 서둘러 해변을 빠져나온다. 깜깜한 해변에서는 자칫 외로워질 수 있다. 아직 외롭기엔 이른 나이다. 겨우 마흔이다.
잠시 내려놓았던 배낭을 다시 메고 해변을 걸어나오는 데, 휴대폰이 울렸다. 뒤늦게 나마 생일을 축하한다는 친구의 메시지였다. SNS 어디가에 공지된 생일날짜를 뒤늦게 발견한 모양이었다. 답장을 보내기 쑥쓰러워 그대로 휴대폰을 집어 넣는다. 아마 친구도 그냥 지나기 뭐해 문자를 보냈을 거였다.
그렇다. 생일이어도 딱히 만나고 싶은 이가 떠오르지 않고, 만나자는 이도 없는 게 마흔이다. 가을 해변처럼 웃음기를 걷어내고 홀로 발자취를 들여다보며 앞으로 나가는 시기가 지금일 것이다.
그렇게, 마흔의 생일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