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달의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혜영 Mar 28. 2017

커피 한 잔 할까요?

달의 일상 (사진 - 네이버출처)

약속시간까지 두어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하릴없이 바람 부는 거릴 배회하다 문득 뜨거운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창 넓은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익숙한 커피향이 퍼지면서 가슴이 따뜻해졌다.


커피를 처음 만났던 때가 언제였더라? 


어린 시절 손님이 집에 오면 엄마가 내오던 커피는 아이들은 마시면 안 되는 음료였다. 귀가가 늦어지는 아빠를 찾아 나선 동네 다방에서 커, 소리를 내며 찻잔을 들어 올리는 아저씨들의 발그레한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금기된 커피의 맛이 궁금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커피를 마셔보니 쓰면서도 달큰한 맛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아주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쓴 것도 아닌 모호한 맛이 영 찝찝했다. 그래도 매 시간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쉬는 시간이면 동전을 들고 자판기 앞에 줄을 서 밀크커피를 마셨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블랙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처음 맛본 블랙커피의 맛은 형용할 수 없이 썼지만, 성인이라면 왠지 쓴 블랙커피를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음악다방으로 향했다. 담배연기 자욱한 실내에서 테이블마다 놓인 설탕통과 프림통을 뒤적이며 팝송을 신청했다. 쓰디쓴 블랙커피와 이해할 수 없는 팝송 가사가 불안한 내 대학생활과 묘한 동질감을 형성했다.


이제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때로는 블랙커피로 진하게 때로는 달달한 밀크커피로 수위를 조절해가며 하루에도 몇 잔의 커피를 들이킨다. 커피만큼 여러 가지 맛을 보여주는 음료도 없고, 인간처럼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종족도 없는 것 같아 커피를 마실 때마다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나의 내면을 파고들어간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거나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을 때, 나는 커피를 마신다. ‘밥 먹자’나 ‘술 한 잔 하자’보다 더 깊이 있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나는 ‘차 한 잔 할까요?’라고 말을 꺼낸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요즘, 어느 때보다 진한 커피향이 그립다. 동전 몇 푼이면 데워지는 ‘벽다방 커피’를 들고 골목길을 거닐어도 좋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우유 거품 가득한 카페라떼를 마셔도 괜찮겠다. 복잡하고 음울한 속마음을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진정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와 마주앉아 블랙커피보다 씁쓸한 세태를 맘껏 이야기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