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방)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루스 오제키)
바다에 가면 그런 상상을 했다. 편지를 바다에 띄우면 수평선 너머, 미지의 누군가에게 전해질까? 당시 나는 많이 우울했고,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던 나는 실제로 편지를 썼고 그것을 병 안에 넣어 바다에 던졌다. 그리곤 병이 멀어질 때까지 수평선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누가 보고 답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십년이 지나도록 답장을 받지 못했다. 여태 넓은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누가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는지, 그것도 아니면 작은 물고기들의 밥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여행에 동참하시겠어요?”
엘리가 초대장을 보내왔을 때, 하얀 파도를 헤엄치던 예전의 편지를 떠올렸다. 나는 흔쾌히 그녀의 초대에 응했고, 며칠 뒤 분홍색 상자와 붉은 인장이 찍힌 편지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받았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고기나 동물성 플랑크톤의
먹이가 되지 않고 해변에 밀려와 발견됐다는 거…….”
우리의 여행은 캐나다의 작은 해변에서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스였고, 소설가였다. 루스는 해변을 산책하다 여러 겹의 비닐 안에 든 소녀의 편지를 주웠다. 그 안에는 보라색 펜으로 쓴 편지외에도 빛바랜 붉은 표지로 장정된 도톰한 일기장과 고장 난 손목시계가 있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 비닐을 열자, 멈춰 있던 손목시계가 다시 움직였다. 바로 우리들의 시간이 열린 것이었다.
“유시란,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당신과 나,
그리고 지금 존재하고 예전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은 ‘마법’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은 조금도 질리지 않았고, 들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졌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루스와 편지를 쓴 나오의 시간이 연결될 리가 없고,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일도, 당신이 읽을 일도 없었을 거였다.
공간을 초월해 사람들이 연결되는 시간을 우리는 ‘유시’라고 불렀다. 서로에게 말은 못했지만, 우리는 저마다 가슴에 보랏빛 멍을 하나씩 안고 있었다. 나오는 미국에서 이주해 일본에 간 뒤 줄곧 동급생에게 이지메를 당하고, 그녀의 아버지 하루키 2는 매일 자살을 시도하고, 전쟁영웅으로 알려진 하루키 1은 사실 군대에서 가혹행위를 당하는 고문관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리고 작아서 쉽게 상처를 받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상처는 잃어버린 시간과 같다. <알 라 르셰르류 뒤 탕 페르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일기장 표지처럼, 우린 모두 비굴하고 찌질한 한때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새까맣게 칠해져 아무도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당신은 나와 통하는 유시인 거고, 우린 함께 마법을 만들어낼 거예요.”
하지만, 시간의 마법은 상처를 아물게 했다. 통증이 최고조에 이르고 상처 안에 차오른 고름이 사라지면 딱지가 생기고 아물었다. 나오와 하루키 1, 하루키 2가 상처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했을 때, 시간은 그렇게 마법을 부렸다.
시간의 마법이란 언제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일까?
시간은 무색무취에 형체마저 없다. 게다가 영원하지도 않다.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고, 유한한 시간이 끝을 향해 가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연결된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조금씩 ‘죽음’을 향한다. 원하든 원치 않던 상관없이 죽음은 하루만큼 가까워진다. 그 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내 유시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정신과 말은 유시다. 돌아옴과 돌아오지 않음도 유시다”
엘리와 동행한 여행은 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돌아보고,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오, 지코할머니, 하루키1과 하루키2 그리고 루스. 시간여행에서 만난 이들을 나는 한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평생 기억하고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나와 같은 시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