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말 이성계 장군(3)
공민왕과 고려의 구조적 모순.
앙시앵 레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단초가 되었다는 구체제의 모순. 성직자와 귀족들이 제1계급이 되어 나라의 법률, 정치, 경제를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가져갔다.
법복귀족이라고 불리던 부르주아 일부 계층은 귀족에 편입되어 기존 귀족보다 오히려 더 백성들을 착취했고, 신흥 부르주아와 농민들까지 대규모 반발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루이16세에 대한 민심은 흉흉해졌다.
하지만 공민왕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고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권문세족을 제어하려 하였고, 이에 공감한 많은 신진사대부들이 공민왕의 비호 아래 상당수 조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고려 경제의 구조적 모순 뿐 아니라, 원나라와의 종속관계도 개선하려 했다.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명과의 관계의 물꼬를 트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왕 이름에 '혜'자가 들어가던 이전의 왕들과는 달리
고려말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개혁을 하려했는가가 아니라, 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됐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만큼 공민왕의 개혁은 고려 왕실의 존위를 가를만큼 중대한 문제였다.
권문세족.
사극 정도전에 이인임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이다. 그럼 이 사람들은 무슨 잘못을 하고, 과연 어떤 기득권을 지키려 한 것일까?
잠시 귀족의 계보를 살펴보도록 하자.
성골, 진골, 6두품이라 불리던 신라 귀족들은 왕건의 건국전쟁을 통해 거의 그대로 고려 귀족에 편입되었다. 왕건의 리더쉽은 온화하였으나, 문어발 결혼을 통해 맺은 지방 호족과의 관계는 고려가 중앙집권을 하는 과정에서는 언제든 불편해질 일이었다.
그것을 피의 숙청을 통해 바로 잡은 것은 광종이었다. 미치거나 빛나거나. 그와 같은 피의 학살을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개혁은 어떤 당위성은 가지고 있었다. 같은 '나라'라는 외투를 걸치고 있다 하여도, 고려와 조선은 시스템적으로 중앙집권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즉, 고려가 조선처럼, 혹은 당시 롤모델로 삼았던 중국의 역대 왕조들처럼 나라다운 나라를 꾸리고 관료제를 정착시키려면 그와 같은 과정은 필수에 가까운 일이었다.
광종의 숙청을 통해 생긴 공백에는 과거제를 통해 새로운 세력들이 입성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중앙 지역의 호족들이었다.
고려는 지방제도를 계속 개혁하여 기존 호족들의 힘을 빼고 있었다. 성종 때는 지방제도를 고쳐 절도사를 파견하기 시작했으므로, 관료들은 자연스레 더욱 힘을 얻게된다. 이렇게 성장한 세력을 문벌귀족이라고 한다.
문벌귀족들이 호족보다 더 큰 문제가 된 것은 이들이 가진 땅을 늘려 대토지 농사를 시작하면서였다. 큰 땅을 가지고 농사를 한다는 것은 농사 효율과 이익 차원에서는 극대화 될 수 있으나, 이런 농사는 필연적으로 노예와 같은 대규모 노동력을 또한 필요로 한다. 고려 광종 시절 노비안검법을 통해 줄여졌던 노비의 비율이 점차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노비에 관한 각종 제약과 법률은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이자겸의 난처럼 문벌귀족들은 이미 폭주하고 있었다.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기간 누적된 불만은 우연한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수박희에서 대장군 이소응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문신 한뢰가 갑자기 뺨을 때렸다. 이후로 100년 동안이나 무신 정권이 집권하는 계기가 됐다.
무신정권 시기는 수없이 난이 일어날 정도로 불안정하고, 국가 시스템이 엉망인 시기였다. 차라리 비대해진 문벌귀족들이 숙청되고, 잘못된 일들이 바로 잡혔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이들의 탐욕과 횡포는 문벌귀족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정권의 기반이 되는 '별초' 사병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이들은 많은 땅과 재산을 필요로 했다.
문벌귀족, 무신,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부원배 '권문세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