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말 이성계 장군(4)
지눌과 의천 등 고려 불교는 여러차례 개혁을 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고려가 비교적 강건했던 시절, 고려의 불교는 호국 불교였다. 그러나 정치 권력과 끈끈한 관계가 되어버린 종교는 어쩌면 타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원나라 시기의 고려 불교는 그 정도가 과했다.
그들은 마치 귀족처럼 대토지를 합병했고, 주지들은 원나라로 유학 가기 바빴다. 길흉화복을 점쳐 주겠다며 신도로부터 돈을 뺏거나 민중의 재산을 강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일도 잦았다. 대다수 사찰들이 부처님의 뜻과는 다르게 탐욕의 길을 걸은 것이다.
물론 땅을 뺏고, 멀쩡한 양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고려에서도 불법이었다.
이런 일은 비단 불교 뿐만이 아니라, 권문세족들에게는 너무 일상적인 일이었다. 유명한 권문세족으로는 원나라 황실에 시집 간 기황후를 뒷배로 세도를 부리던 기철을 예로 들 수 있다.
사실 고려에게는 개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원나라에서 파견한 다루가치가 노비제도를 혁파하려하기도 하고, 토지 문제 또한 고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때마다 왕이나 권세가들이 나서서 이를 가로 막았다.
그리고 부모 둘 중 하나만 천민이어도 자식 또한 천민이 되는 일천즉천제로 인해 고려는 세금 내는 양민은 줄고, 천민이 느는 마치 악성 채권을 가진 나라처럼 됐다.
그리하여 공민왕의 개혁은 단순히 자주성의 회복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고려의 타들어가는 마지막 촛불을 되살릴 것이냐 꺼뜨릴 것이냐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하필, 그 순간 홍건적이 대규모로 침입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