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서귀포에는 한라산 남쪽 지역 최초의 성당이 세워집니다. 1902년 이곳에 낯선 외국인 에밀 타케(한국명 엄택기)가 3대 주임 신부로 파견됩니다. 187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에밀 타케는 24세에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1898년 1월 조선으로 온 타케는 부산본당에 이어 1902년 4월 서귀포 하논본당에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1901년 제주에는 신축교안이 일어났습니다. ‘이재수의 난’으로 더 알려진 신축교안은 그 당시 가톨릭을 앞세운 봉세관이 제주도민에게 극심한 횡포를 저지르자 이재수를 장두로 봉기한 민중항쟁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인은 물론 일반 도민들도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해요. 하논성당도 신축교안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천주교 교세가 꺾이고, 어려운 시기에 제주에 오게 된 에밀 타케 신부는 제주 문화를 존중하는 자세로 제주인의 마음을 열고, 천주교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 제주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타케 신부는 선교 자금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타케 신부에 앞서 이미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포리 신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힌트를 줍니다. “식물을 채집해서 유럽의 식물원, 박물관 등에 보내면 자금을 해결할 수 있다.” 그 당시 서구의 열강들은 식민지 영토뿐 아니라 동, 식물의 우수한 유전자를 확보하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힘이 약한 나라에서 주둔군과 선교사를 적절히 활용해 자원을 빼냈습니다. 포리 신부는 이미 일본에서 식물학자로 유명했는데, 포리 신부가 제주에 방문하면서 타케 신부에게 식물 채집과 표본 제작, 판매 방법 등을 전수해 줍니다.
1907년 포리 신부와 타케 신부는 한라산을 오릅니다. 해발 1,700m,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푸른 나무를 채집하게 됩니다. 채집한 나무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아널드 식물원으로 보냅니다. 아널드 식물원 식물학자 윌슨은 한라산에서 채집한 나무를 기본 표본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 아놀드 식물원 연구 보고 1권 3호을 통해 [Abies koreana E.H. Wilson]이라는 학명으로 지구상에 유일한 신종으로 발표합니다. 처음 이 나무는 평범한 분비나무로만 알려졌는데, 1920년 영국의 식물학자 윌슨에 의해 분비나무와는 다른 신종으로 밝혀진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이 나무를 구상나무로 부릅니다.
이후 구상나무의 아름다운 특징에 반한 서구 사람들은 계속 품종 개발을 합니다. 그렇게 구상나무는 현재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인기 있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미국 아널드 식물원에는 한라산에서 채집한 기준표본의 종자에서 육성된 구상나무가 여전히 자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크리스마스트리로 알려진 나무는 제주도에서 넘어간 구상나무를 개량한 나무로, 오히려 로열티를 주고 역수입하고 있습니다.)
구상나무는 빙하기 때 번성하다가 기온이 상승하면서 고위도 방향으로 후퇴하였는데, 이때 후퇴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높은 산을 피난처로 살아남은 북방계 유존 식물입니다. 제주도의 경우 한라산국립공원, 내륙 지방의 경우 백운산, 지리산국립공원, 무등산국립공원, 영축산, 금원산, 가야산국립공원, 덕유산국립공원, 속리산국립공원 등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내륙의 산에는 정상부 능선에 소수의 구상나무 개체 혹은 개체군이 자생하고, 한라산의 구상나무 군락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구상나무 단일 군락이면서 세계에서 유일한 자생 군락지입니다.
성게와 나무의 제주어인 '쿠살'과 '낭'을 합쳐 '쿠살낭'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구상나무라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제주에서는 구상나무의 잎이 성게가시처럼 생겼다고 쿠살낭이라고 불려 왔습니다.
구상나무는 한국에 분포하는 대표적인 고산성 식물로 서식처가 한정적이고 고립되어 있어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미 한라산 구상나무는 생장이 둔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빠른 속도로 고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진달래밭 일대의 구상나무는 90%가량이 이미 고사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규모 고사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자연적 영향, 병충해, 급격한 기후 변화 등 복합적 원인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될 뿐입니다. 현재 구상나무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Led list)에 멸종위기종(EN)으로 분류된 상태로 우리 모두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제주도에서도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통해 구상나무 복원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고, 오히려 고사는 더욱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환경부는 구상나무의 개체 수가 절대적으로 적지 않다는 이유로 구상나무를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하지 않고 있으며, 정부 차원의 현황 조사도 제대로 시행한 바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