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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편액은 누가 불태웠을까?

by 우주가이드
비해당의 액자는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 걸려 있는 것은 아계의 필적이다.


1601년(선조 34년) 길운절(吉雲節)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된 소덕유(蘇德兪: 정여립의 척분)를 찾아가 제주목사를 죽인 뒤 무기고를 털어서 한양으로 쳐들어가겠다는 모반을 도모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소덕유의 처에게 알려지자 길운절은 먼저 관에 나아가 고변하였습니다. 당시 제주목사 조경(趙儆)이 소덕유 등을 체포하여 서울로 보내 처형하게 하였습니다. 길운절은 먼저 고변하여 용서를 받았지만,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지 못하였음을 원망하다가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당시 공모에 가담한 제주도민 10여 명이 처형을 당하고, 조정에서는 제주를 ‘반역고을’로 낙인을 찍어 제주도 전체가 뒤숭숭해집니다. 조정은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만에 김상헌을 안무어사로 파견해서 제주 실정을 잘 파악하도록 하는데, 김상헌은 6개월 동안 제주에 머물며 사건의 실정을 파악하고, 흉흉했던 제주의 민심을 잘 달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 간의 기록으로 여행 일기 <남사록(南槎錄)>을 남깁니다. 남사록에는 재밌는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비해당의 액자는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 걸려 있는 것은 아계의 필적이다.’ 이 기록은 관덕정 편액에 관한 기록인데 비해당(匪懈堂)은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4대 명필인 안평대군의 호이고, 아계(鵝溪)는 조선 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호입니다. 신석조(辛碩祖: 1407~1459, 조선 초기의 문신)가 쓴 관덕정기(觀德亭記)에는 ‘제액(題額)은 제가 안평대군에게 요청하여 받아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관덕정 편액이 안평대군의 글씨에서 이산해의 글씨로 바뀌게 됩니다.


널빤지에 글씨를 써서 걸어 놓은 것을 흔히 ‘현판(懸板)’이라고 부릅니다. 궁궐, 관아, 사찰 같은 곳에 건물의 이름을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을 쉽게 볼 수 있는데, ‘현판’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담고 있는 말은 ’편액(扁銀)’입니다. 편액은 표제, 제목을 의미하는 ‘편(扁)’과, 이마를 의미하는 ‘액(額)’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편액은 건물의 이름을 써서 문호 위에 거는 액자를 말합니다. 편액에는 루(樓), 정(亭), 재(齋), 당(堂), 헌(軒), 각(閣), 사(祠) 등으로 끝나는 2~5자 정도의 글이 새겨져 건물의 기능,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편액이 언제부터 유래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전하는 말로는 중국의 진(秦) 나라 때부터라고 하나, 문헌상 구체적인 기록은 한(漢)나라 때부터 확인됩니다. 한나라 개국의 일등 공신인 소하(蕭何)가 서서(署書)라는 글자체로 두 궁궐에다 각각 ‘蒼龍(창룡)’과 ‘白虎(백호)’라고 써 붙였다고 합니다. 중국의 한자 문화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현판의 풍습도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편액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충남 공주에 있는 마곡사의 ‘大雄寶殿(대웅보전)’을 신라 명필 김생(金生)이 썼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신라 이후 몇 차례 폐사(廢寺) 되었다가 다시 세워졌으며 대웅보전도 조선시대 건물이어서 신빙성이 약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영주 부석사의 ‘無量壽殿(무량수전)’과 안동 민속박물관에 보관된 ‘安東雄府(안동웅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모두 고려의 공민왕이 쓴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편액은 주로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르는 소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황장목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무 속에서 옅은 황갈색이 배어 나와 은은한 아름다움을 주기 때문에 편액에 즐겨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황장목으로 가로로 긴 사각형의 나무판을 만들고 글씨를 새기지만 드물게 세로로 긴 사각형의 나무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서울의 남대문에 걸린 ‘崇禮門(숭례문)’이 대표적인 세로형 편액입니다. 아주 드물게 나뭇잎 모양이나 타원형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글씨는 음각, 양각, 음양각 등으로 새기며, 흰 바탕에 검은 글씨, 검은 바탕에 흰 글씨 등 대비되는 색으로 만들어 글씨가 깔끔하면서도 뚜렷하게 보이도록 합니다. 나무판의 가장자리에 그림을 그리거나 무늬를 새기기도 합니다. 편액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은 조선시대입니다. 정도전(鄭道傳)은 한양 궁궐의 전각에 이름을 짓고 편액을 걸었으며, 성종(成宗) 때는 궁궐의 모든 문에 편액을 걸었습니다. 16세기 이후 전국에 서원(書院)이 설립되면서 서원의 이름을 적은 편액이 사용되었고, 사대부가에서는 서원보다 이른 시기부터 정자(亭子) 등에 편액을 건 기록이 확인됩니다. 현재 남은 편액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이후의 것들입니다. 편액에 글씨를 쓴 인물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것도 조선의 선비들이 가진 정신세계의 일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고 하여 글씨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사람의 도덕적 가치, 정신적 면모가 글씨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여겨 아직 이름을 드러낼 만한 글씨가 아니라는 겸손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풀이됩니다. 물론 일부 편액에는 낙관(落款)과 함께(낙관조차 마모된 것이 대부분이다)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도 나타나고 있는데, 대개는 직업적인 서예가, 화가, 관직자 등입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 조선의 명필가인 석봉 한호, 독보적인 글씨체를 남긴 미수 허목, 화가인 단원 김홍도, 추사체로 이름이 높은 추사 김정희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편액의 글씨는 2~5자 정도의 짧은 글로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세계, 가치관 등을 반영하고 있는데, 대개는 그 내용이 효(孝), 조상에 대한 추모, 선현에 대한 존경, 학문에 대한 신념과 열정, 유유자적하고자 하는 선비의 정신세계 등을 함축적으로 담은 인문 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편액에 새긴 글로 가장 많은 것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이백(李白), 두보(杜甫), 황정견(黃庭堅) 등의 시(詩), 백이숙제의 고사, 중국의 고사 등을 인용한 것이며, 다음으로는 지명과 개인의 호(號)를 인용한 것입니다. 서원의 이름은 대개 지명을 인용한 것이 가장 많은 편입니다. 그 외에 사서오경,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을 인용하였으며 사서오경 중에서는 특히 논어(論語)의 글귀를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또한 글씨체는 단정한 형태의 해서(楷書)가 가장 많으며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이 내용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편액 550점을 분류한 것으로, 한국 전체의 편액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편액의 글씨는 단 1점만 남은 유일한 글씨체로 위작(僞作)이나 동일한 글씨체가 없기 때문에 훼손되면 대체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편액이 한 점 사라진다면 편액 제작 당시의 대표적인 서체(書體)가 사라지는 것이며, 편액에 담긴 시대정신도 사라지는 결과가 됩니다. 이에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 서울의 고궁 박물관에서는 편액에 담긴 기록유산으로서 중요성을 감안하여 원본 편액을 기탁받아 보관, 연구하는 사업을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편액의 기록 유산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를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록유산(MoWCAP)으로 등재하였습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oW)으로 승격, 등재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며, 편액의 영구 보존과 기록 유산적 가치를 널리 홍보, 연구하기 위한 사업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제주의 옛 기록에 안평대군의 편액이 불에 타 이산해의 새로운 편액이 걸렸다고 하는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년)에 창건하였고, 김상헌이 제주에 왔던 시기는 1601년입니다. 김상헌의 기록에 의하면 1448년과 1601년 사이에 관덕정 편액이 불에 탄 사실이 있습니다. 이산해란 인물로 간격을 조금 더 좁혀 볼 수 있습니다. 이산해의 생몰년은 1539년~1609년이고, 과거 급제는 1561년(명종 16년)에 합니다. 그렇다면 1561년과 1601년 사이 약 40년간 중에 관덕정 편액은 불에 타 새로운 편액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주의 어떤 기록에도 관덕정이 불에 탔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가장 큰 행정구역에 있는 읍성, 그 성안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한 관덕정에 만약 불이 났다면 분명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인데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에는 화재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덕정 편액만 불에 탔을 가능성이 있었을까요? 관덕정은 제주읍성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관덕정 왼쪽으로는 제주목사와 중앙군이, 오른쪽에는 판관과 지방군이 있습니다. 지방행정의 중심에 관덕정이 배치된 것입니다. 관덕정에서 편액만 불에 탔다면 일부러 편액을 내려 불에 태웠다는 것인데, 과연 조선 시대 왕가의 손길이 묻어 있는 편액을, 그것도 제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공간에서 가능했을까요?


<남사록> 번역본의 저자 홍기표 박사는 이 기록이 사찬(私撰)이란 것에 주목합니다. 청음 김상헌은 안무어사로 6개월간 머물며 개인 일기 형식의 기록을 남기는데, 짧은 기간 동안 개인이 보고, 들은 개인의 견해를 방대한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물론 <지지(地誌)>, <남명소승(南溟小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표해록(漂海錄)> 등 많은 문헌 자료를 참고하면서 객관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 기록의 한계가 있다고 홍기표 박사는 이야기합니다. 또한 남사록 이후에 편찬된 관찬(官撰) 서적에서 여전히 관덕정 편액은 안평대군의 글씨로 기록하고 있어 과연 어떤 기록이 맞는지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역사학자가 아닌 스토리텔러 관점에서 과거의 일을 상상해 보는 건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김상헌의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면 왜 그런 기록을 남기게 됐을까요? 만약 정확한 기록이었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안평대군의 글씨에 불을 지른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1561년과 1601년 사이 제주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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