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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가이드 Mar 01. 2020

한라산 기행문

성판악 탐방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그 마음을 먹는 게 쉽지 않아서 그렇지.


올해 제주는 예년에 비해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다. 1월에 한 번 기회를 놓치고 제대로 된 설산을 보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던 차에 반가운 눈 소식을 들었다. 이번엔 젤 것도 없다. 날이 풀리면 바로 등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왠지 이번 눈이 올 겨울 마지막 눈일 듯싶어 백록담 가는 길에 잠깐 사라오름을 들르기 위해 성판악 코스로 계획했다.


새벽 4시 반에 기상. 6시에 집에서 나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성판악 입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다. 주차장도 만석으로 갓길에 차를 세우기 시작한다. 서둘러 등산 장비를 챙기고, 심호흡 한 번과 함께 한라산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시간은 06시 50분.


하얀 눈을 밟고 천천히 올라가는데 깜깜하던 뒤에서 빛이 느껴졌다. 여명이었다. 이 시간, 이 장소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주황색 여명과 하얀 눈의 환상적인 대비이다.



사라오름 입구까지는 여러 등산객들과 섞여 올라왔다. 나는 계획했던 대로 진달래밭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사라오름 탐방로로 들어섰다. 지난가을 물이 가득 차 환상적인 풍광을 보여주었던 산정호수가 새하얀 설원으로 변해있길 기대하며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산정호수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눈이 많지 않아 약간은 실망했다. 한 5년 전 올라왔을 때 사방이 하얀 사라오름이 주는 감동을 다시 얻지 못하고 서둘러 백록담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속밭 대피소를 지나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하루에 오름 다섯 곳을 오르내린 것보단 힘들었지만- 적당히 오를만했다. 진달래밭에서 보이는 백록담 봉우리가 조금의 감동을 주려고 한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백록담을 가기 위해선 12시 전에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 다짐이 필요하다. 마침 출입통제를 하는 국립공원 직원이 지금까지 올라온 길 보다 몇 배는 힘들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눈도 훨씬 많고, 길이 없어 쉽지 않다고 한다. 이미 정상을 가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이 얘기에 얼마나 흔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저 얘기를 그냥 무시했다. 솔직히 ‘힘들어 봤자 얼마나?’라는 생각과 함께 진달래밭 대피소를 떠나 진정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헌데


그리 오랜 시간을 오른 거 같진 않은데 왜 이리 힘들지?



끝없는 오르막, 눈에 푹푹 빠지는 발,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땀에, 내 체력에 대해 재평가를 하는 동안 심각해지는 내 뇌는 나이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걱정까지 생각 트리를 뻗히고 있다.


끝이 보이기 시작은 하는데 끝이 나지 않는다.



이 고비만 넘으면 이 능선만 넘으면 다다를 거 같은데 또 고비가, 또 능선이 나온다.



진짜 끝인가 싶을 때 마침내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게 보였고, 감정이 벅차오른다.(아마 이 감정은 ‘드디어 정복했다.’에 대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오르기에 급급해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눈 쌓인 백록담, 발아래 깔려있는 구름, 그 밑에 보이는 마을,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또다시 감정이 벅차오른다.(이번엔 환상적인 풍광에 대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려갈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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