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무의식이 나에게 걸어오는 말이라고 한다. (칼 융)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여명만큼이나 희미한 꿈속에서 분명한 하나의 이미지가 사진처럼 보였다.
초록색 운동복 상의, 색이 바랜 회색빛 츄리닝 바지에 토슈즈를 신고 UP 하고 있는 열살쯤 된 내 모습이었다.
그 이미지와 함께 '이사도라 던컨'이라는 이름이 마음으로 들려왔다.
'맨발의 이사도라 던컨'은 이른 아침에 나를 아득한 어린 시절로 데리고 갔다.
엄마는 발레학원에서 돌아온 내게 이사도라 던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발레슈즈를 신지 않고 맨발로 자유롭게 춤을 추었던 여자라는 것만 기억한다. 학원에서 동작을 코치해 주는 선배 언니들이 스텝을 밟을 때마다 마룻바닥에 둔탁하면서도 세련된 소리를 내던 토슈즈를 신을 날을 꿈 꾸던 나는 가정 사정으로 발레 교습을 그만두고 토슈즈와 함께 춤에 대한 흥미도 잃어버렸다.
그런데 꿈결에 찾아온 나의 소녀는 '에샤뻬' 동작을 하고 있는 다리와 차렷 자세로 내린 팔과 무표정한 얼굴이 부조화를 이루며 서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사도라 던컨은 맨발로 그리스 여신처럼 자유롭게 춤을 춘다.
그러면 나의 소녀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토슈즈를 벗어 버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사도라 던컨처럼 훈련을 거치는 동안 힘들어도 토슈즈를 신고 연습을 계속하라고 해야 할까?
이 질문은 나에게 한계를 알고 처신하든지, 아니면 포기하지 말고 노력 하든지를 결정하라는 듯이 들려서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커피를 마시려고 침대에서 내려오면서 습관적으로 신던 실내화를 일부러 벗어버리고 맨발로 부엌으로 가보았다. 새벽의 한기가 차가운 타일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다시 실내화를 신고 커피를 타면서 문득, 이사도라 던컨이 신고 있던 토슈즈를 나의 소녀가 신고 있다면 그 아이가 원하면 벗고, 필요하면 신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제 3의 답이 떠올랐다.
고대 근동에서 신발은 발을 보호해 주는 기능뿐 아니라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신발을 신는다는 의미는 신분을 의식하고 보여지는 패르소나 (사회적 자아)로 산다는 뜻일 것이다.
나의 어린 소녀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초라한 현실 속에서도 꼿꼿이 서 있는 무용수의 자태를 가지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페르소나가 버거워서 지칠 때면 배운 대로 슬픔과 분노를 삭이느라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어린 소녀에게 다가온 이사도라 던컨은 " 권리와 책임이라는 신발을 벗어버리고 자유가 삶이 되는 춤을 추지 않을래?"라고 초청한다.
나의 소녀는 신을 벗고 신기를 반복하면서 책임 있는 자유를 누리는 성인으로 성장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