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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비 오는 날, 도쿄의 우산들

언어의 정원에 나온 비오는 신주쿠 공원에 다녀왔습니다.

by 밝을 명 가르칠 훈 Feb 12. 2025

1장. 도쿄에서 낭만을 발견하는 법


비 오는 날의 도쿄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다.

맑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빗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길거리를 가득 채운 우산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그리고 젖은 아스팔트 위로 흐릿하게 비치는 불빛들.


나는 비 오는 도쿄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우산을 쓰지 않고, 그냥 천천히 빗속을 걸어보는 날도 있다.

그러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근처 카페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비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조용히 감상한다.


비 오는 날, 도쿄는 더욱 낭만적이 된다.


비 오는 날, 도쿄를 걷다


한국에서 나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좁은 인도 위로 수많은 우산이 오가고,

버스나 전철에서는 축축한 공기가 따라 들어왔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게 귀찮아서 그냥 맞고 걸었다가,

어느새 신발과 옷이 흠뻑 젖어버린 날도 있었다.


그러다 도쿄로 가고자 마음 먹은 날, 비가 왔다.

그날, 비가 전해준 시원한 감각을 기억한다.

비는 맑은 날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선물한다는 것을.


도쿄에서의 어느 오후, 가벼운 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우산을 쓰지 않고, 일부러 비를 맞으며 걸었다.

우산을 들고 바쁘게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오히려 속도를 늦췄다.


보통은 그냥 지나쳤을 간판이

빗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났고,

젖은 도로 위로 번지는 네온사인이

마치 유화 그림처럼 보였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우산을 들고 있었다.

투명한 비닐 우산,

작은 접이식 우산,

어디선가 무료로 받은 듯한 광고 우산,

그리고 정장을 입은 사람들의 깔끔한 블랙 우산까지.


도쿄의 비는

사람마다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페 창가에서 바라본 흐릿한 풍경


비가 점점 거세지자,

나는 근처 카페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창가 자리,

비 오는 날 가장 좋은 자리.


창밖을 바라보면,

비에 젖은 거리 위로 사람들이 오간다.

각자의 우산을 들고, 각자의 속도로.

빗소리와 함께 흐릿한 풍경이

마치 수채화처럼 번져 보인다.


가끔 우산을 접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카페 문을 열 때,

순간적으로 차가운 빗물이 흩어진다.

따뜻한 실내 공기와 대비되는 그 찰나의 순간.

그 미묘한 감각이 좋다.


창문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빗방울이 흘러내리면서

창밖의 풍경을 일그러뜨린다.

조금 전까지 뚜렷했던 거리의 모습이

어느 순간 흐려지고,

그 흐린 풍경 속에서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시간을 보낸다.


도쿄의 비는

바쁘게 흘러가던 도시의 시간을

잠시 멈춰 서게 만든다.


신주쿠 공원, 그리고 ‘언어의 정원’


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言の葉の庭).


이야기는 비 오는 신주쿠 공원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타카오는 신발을 만드는 꿈을 꾸는 소년이고,

유키노는 어딘가에 상처 입은 채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어른이다.


그들은 우연히 신주쿠 교엔의 정자에서 만난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서로를 만나고,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온도를 바꿔간다.


애니메이션 속 풍경은 유난히도 섬세하다.

비에 젖은 나뭇잎,

물이 고인 연못의 잔잔한 흔들림,

그리고 비가 그친 후의 투명한 공기까지.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신주쿠 공원으로 가곤 한다.

그저 애니메이션 속 그 장소를 찾아가고 싶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비에 젖은 흙냄새가 짙게 퍼졌다.

나무들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연못 위로는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애니메이션 속 그 정자가 있었다.

누군가 앉아 있으면 어쩌지?

괜히 조심스레 다가가 정자를 바라본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곳에 서있는다.

그 순간은 빗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나무 사이를 타고 흐르는 빗물,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들,

멀리서 들려오는 도쿄의 희미한 소음.


그곳에 앉아 있자니,

언어의 정원 속 타카오와 유키노가

정말로 이곳에서 마주쳤을 것만 같았다.


나는 책 한 권을 꺼내어 읽었다.

그리고 차분한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 순간, 나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속에

잠시 머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이 만들어주는 낭만적인 분위기


비 오는 도쿄에는,

길을 걷는 사람들의 속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비를 피해 빠르게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일부러 천천히,

빗소리를 들으며 걸어간다.


어떤 연인은

한쪽 우산 아래에서 몸을 기울이고,

어떤 친구들은

비를 맞으며 뛰어가며 웃고 있다.


이자카야 앞에서는

젖은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이

따뜻한 라멘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마신다.


그리고 저 멀리,

혼자 우산을 쓰지 않고

빗속을 걸어가는 사람이 보인다.

마치 나처럼,

비를 맞으며 걷고 싶은 날이었을까.

그냥 우산이 없는 날일까.


도쿄의 비는 감각을 깨운다.


나는 비 오는 도쿄를 사랑하게 되었다.

촉촉해진 공기,

젖은 도로 위로 번지는 불빛,

그리고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작은 음악들.


신주쿠 공원의 정자에서,

나는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처럼

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산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오히려 걸음을 늦춘다.


비가 내리는 순간,

도쿄의 소리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나는 그 비 속에서

낭만을 듣는다.


당신도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는 날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언젠가, 그런 날에 이 글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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