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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니언 Aug 25. 2021

수많은 갈등 속에서 빛나는 인간존중

모가디슈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이고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면 나중에 영화나 VOD를 보시고 보기 바랍니다





후반부의 탈출씬에서의 긴박함은 영화관 특유의 꽉찬 화면과 빵빵한 음향으로 인해 그 긴박함을 확실히 다가오게 하여 코로나로 잊고 있던 영화관만의 매력이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추격씬뿐만 아니라 영화내에 흐르고 있는 크고 작은 갈등도 매력적인데 먼저 강대진 참사관(조인성)과 공수철(정만식) 서기관의 의견 차이와 그걸 중재하고자 하며 본인도 강대진 참사관의 눈치를 보는 한신성 대사(김윤석)의 행동을 통해 참사관과 대사조차도 갈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 측 참사관 태준기(구교환)가 지시한 습격으로 인해 북한측에 기싸움을 하는 남한 대사관의 모습,

남한 측 정보전으로 오히려 반발하는 림용수(허준호) 대사의 모습 등을 보여준다. 이러한 크고 작은 갈등은 소말리아 내전 중에도 류승완 감독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데 왜 굳이 이런 갈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지는 필자는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말리아 내전 초기 부분은 사실 남한 대사관에게는 남의 나라일이기에 그닥 다가오게 되지 않지만 남한 대사관 운전사인 솨마가 반군 맴버로 추정되면서 소말리아 내전은 대사관 인원들에게 확실히 다가 오게 된다. 솨마의 모습을 본 공수철 서기관이 솨마의 상황을 한국의 운동권 상황으로 빗대어 이야기 하는데 

사족이지만 필자는 이 부분이 어색하게 다가 왔는데 90년 초반의 공무원이 운동권에 대하여 저렇게 친화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그 시기를 잘 모르는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다.)

솨마의 반군의혹으로 인해 대사관 부인 김명희(김소진)와 대사관 직원들은 잠시 갈등하게 되지만 일단 데리고 있게 된다. 후에 솨마 스스로 탈출하기에 이 갈등은 영화 내의 다른 갈등과는 다르게 짧게 끝나게 된다.

모든 대사관들이 반군의 습격을 받게 되었는데 남한 대사관도 예외가 아니라 폭도들이 들이닥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대사관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지만 그 외침과 함께 정부군의 반군 해산을 위해 각종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정말 폭력만이 답이라는 암울한 사실을 일깨워 줘 버린다. 영화내의 수많은 갈등 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그 갈등 해결을 보여주는데 굳이 이런 장면을 넣을 것은 아마 남북한 대사관끼리의 협력을 좀 더 부각 시키고자 류승완 감독이 넣은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북한 대사관은 남한 대사관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나마 믿었던 정보원이 반군으로 변한 상태이고 그 반군들이 쳐들어와 북한 대사관을 다 털어버린다. 태준기가 나름 저항을 해보지만 허무하게 제압당하며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다. 필자는 그때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얻어터진다. 클리셰대로라면 북한 측 요원의 인간병기(?)적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결국 북한대사관 인원들은 대사관에 나와 중국 대사관으로 갔지만 그곳도 불타버린 상황이고 소년병들에게 장난감처럼 농락당한다. 아이 특유의 장난기가 잔인한 폭력과 결합하는 그 간단한 장면은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기에는 충분하였다. 결국 그나마 가까운 남한 대사관에 

한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이런 남북한 관련 매체에서는 같은 민족이기에 도와 달라고 하는데 림용수 대사의 구조요청은 그런 우리가 남이가라는 그런 것보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도와야 한다는 지극적 휴머니즘적 내용을 담고 있다.

후반부에 결국 남북한 대사관 인원들은 차에 책,가구부품으로 차를 감싼 채 소말리아를 탈출하고자 하는데 이 장면에 한신성 대사와 림용수 대사가 같이 작업을 하던 중에 콩트를 하는 것처럼 서로 타박하는 장면은 약간 웃기기도 하고 서로 마음의 벽이 허물어 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보인다. (아니면 김윤석 배우의 애드리브일 수도 있다.) 중반까지도 서로를 경계하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보여 주지 않는다.

소말리아를 탈출하고 케냐 공항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 강신성 대사가 서로 모른 척 하자는 대사를 시작된 장면은 죽음의 경계를 같이 걸은 사람들의 모습 같지가 않다. 남북한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서로의 친밀한 모습이 서로에게 독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일부러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러한 '한민족이라서' 라는 것을 영화는 의도적일만큼 축소하는데  '한민족'이라서가 아닌 같은 '인간'이기에 서로를 도운 것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소위 신파라는 과잉된 감정을 이 영화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자의 돈이 전혀 아깝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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