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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14. 2018

모든 활동은 컨텍스트 내에서 의미를 얻는다

2015년 11월 1일 

낢이라는 웹툰 작가분이 있다는 걸 최근의 모모 이야기로 알게 되었다. 생활툰 몇 개 봤다. 뭐 아주 미친 듯이 재밌다(이건 "죽어도 좋아"!!)는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볼 만 했다. 하지만 포인트는 이 웹툰이 -     


1) "아무리 잘난 여자도 결혼생활 하면 망한다"는 걸 절절히 보여주는 웹툰이냐, 아니면 

2) "잘만 사는 부부를 가지고 오버 예민 프로불편러들의 지적질"이냐... 의 쟁점인데.     


이거 솔직히 좀 찔리는 점이 많다. 난 메타데이터로 삶을 사는 사람이라서 이런 데 심히 예민했다. 일찍 결혼해서 살면서, "이건 전통적인 여자가 하는 역할인데 내가 하는 건 그걸 답습하는 것 같아 싫어!!" 를 실천했다. 요리하는 게 싫었고, 배우는 것도 싫었고, 잘 하게 되는 게 두려웠다. 청소도 그랬고 빨래도 그랬다. 애 빨리 안 낳은 이유도 조금은 그 때문일 거다. 그냥 그렇고 그런 아줌마, 애 엄마가 되기 싫었단 말이지.

그래서 결국 지금은? 그냥 그렇고 그런 아줌마, 애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ㅎㅎ 애 기저귀도 갈고 애 울면 밤새 안아서 둥기둥기 하고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남편 뒷바라지...는 음 좀 못하는구나 하여튼 이것저것, 내가 안 하겠다고 했던 거 아주 많이 하고 산다.

이게 비참한가? 결국 나도 별 수 없이 결혼하니까 이렇게 불쌍하게 사는 건가? 낢님 툰에서 공감했던 게 "엄마 닮아간다"인데, 애 낳아보니까 왜 엄마가 "뭐 먹고 다니냐"물어보는 게 이해 가더라. 나도 똑같이 물어본다. 직장 다니면 직장 얘기가 많아지고, 남친 생기면 남친 얘기 많아지듯이, 애 키우는 거 팔 할이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건데 그걸 이십 년 하면 당연히 뭐 먹었냐가 디폴트로 새겨질듯.

인간이 할 수 있는 활동 중에서 그 활동 자체가 아름답고 화려하며 즐거운 건 별로 없다. 모든 활동은 컨텍스트 내에서 의미를 얻는다.


어떤 사람이 뒷마당에 금광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하루에 삽질을 두 시간씩 해서 일당 삼백만원을 번다. 삽질 자체야 그리 대단해 보일지 않지만 하는 사람은 당당하다. 한 삽 한 삽 뜰 때마다 돈 생기잖아. 오늘 번거로는 랩탑 새로 사고, 며칠 파면 집 인테리어 수리도 할 수 있겠고, 핫핫 옆집 영수는 두 시간 파도 백만 원밖에 못 버는데... 등등의 컨텍스트로 뒷마당 삽질러는 삽질이 행복하다.

똑같은 삽질이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사병들 굴린다고 삽질시키는 경우를 보자. 열심히 파 놓으면 다음 조가 다시 묻어버리고, 그러면 또 파야 한다. 게다가 내가 삽질하는 동안 다른 놈들은 옆에서 야구 보면서 놀다가 내 쪽으로 담배꽁초나 틱틱 버린다. 행복한가?

결국 행동 자체의 의미보다는 행동을 하는 이유,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대가, 일 하면서 계획할 수 있는 미래의 모습으로 나의 반응이 많이 달라진다.


즉문즉설 이런 거나 심리 상담 보면 마음 고생하는 이들에게 하는 답들이 비슷하다. 네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마음가짐일 뿐이니까 그걸 바꿔라 뭐 그런. 맞는 말이다. 천하에 쓸데없는 삽질이고, 남에게 무시당하는 삽질이라도 내가 마음가짐을 바꾸면 그게 또 편해질 수 있다. 아, 이렇게 두 시간 삽질하면 칼로리가 1400kcal니까 살 빠지겠군. 몸 튼튼해지네. 강제 수용소 안 끌려간 게 어디냐. 제설작업보다는 낫다 등등.

이것은 확실히 훌륭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걸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난 이제 요리하는 것, 청소하는 것, 애 보는 데에서 비참함은 느끼지 않는다.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여자가 살림을 하면서 아 남편을 내조하는 재미도 있구나 느낄 수는 있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야, 너 날 내조한다고 마음을 바꿔먹으면 되잖아... 하면 안 되는 것.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이 그래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더라 하며 자기를 위로할 수는 있지만,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보고 똑같은 말을 하면, 그것은 상대의 문제를 최소화하면서 그 사람의 잘못으로 넘겨버리게 된다. 네가 마음만 다시 고쳐먹으면 되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남이 힘들다고 하면 그거 별거 아님/ 니가 정신상태가 글러먹어서 그럼 이라는 반응보다는 아, 그렇구나. 힘들구나... 가 옳다고 생각한다.     


결론 

행동 자체만으로 판단하기 힘들다 컨텍스트가 중요하다 (예: 육아->노예짓? 보람 만빵 삶의 의미?) 

컨텍스트가 있고 사회적인 판단이 있다 하더라도 내 마음가짐으로 컨텍스트를 바꾸면 적응 가능하다 (예: 명절에 시댁 가서 노예짓 -> 일 년에 몇 번 남편 기세워주는 봉사) 

그렇다고 해서 딴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극복 가능하므로 니가 느끼는 건 별거 아니고 네가 마음가짐 바꾸면 된다는 매도는 안 좋음. (예: 난 이제 별 투정 없이 요리하고 집안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에게 "너도 결혼해봐!! 이쁜 새끼 사랑하는 남편 챙기는 게 왜 분해?? 니가 어려서 뭘 잘 몰라서 그런 거임" 요러시면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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