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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y 31. 2018

짜파게티 vs 팔도 비빔면의 차이

2015년 11월 3일

아래 답글 쓰다가 갑자기 생각.

난 사람 목소리에 참 약한 편이다. 누가 말로 설명해주면 잘 이해 못한다. 내가 책으로 읽는 게 훨씬 빠르다. 말로 들으면 그걸 내 머릿속에서 모델로 바꿔서 시스템화해야 이해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방법은 늘 시각화였다. 모델화, 시각화. 텍스트 중심.

이 시각화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난 이민 가서 첫 10년 동안은 누가 말을 할 때 그 사람 얼굴 아래에 자막이 깔렸다. 빨간펜으로 문법 교정까지 했다. 그 사람이 한 말이 내 머리로 자막처리화가 되어야 이해가 된다고 해야 되나. 그래서 뭘 하는 중에 누가 내 이름 부르면 잘 못 듣는다. 인풋 들어온다는 경고가 있어야 내가 신경을 쓰고, 신경을 써야 이 어려운 목소리 정보를 시각화할 수가 있잖소.

ADHD, 주의력 조절 장애의 문제 중 하나가 inability to follow instructions - 시키는 걸 제대로 못한다 - 인데 내가 딱 그렇다. 말은 잘 듣는 편이라 이해하면 잘 하는데, 말로 해주면 나 진짜 심하게 모자란 애처럼 잘 못알아듣거나 기억 못한다. 특히 길 가르쳐 줄 때 심하다. 누가 길 가는 법 설명해주면 듣는 척하고 고개는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다들 GPS 차냥해!! 구글맵 차냥해!! 이러고 있다. 작은 그룹에서 개인적인 수다 떠는 것은 백퍼센트 집중하기 때문에 이해 쉽고 괜찮고 재밌으나 주위 소음이 좀 크다던지 그룹이 나눠져서 대화 따라가기가 힘들다 하면 곧바로 집중력 증발.

하지만 한 번 시각화 하고 모델화, 시스템 화 된 건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 응용도 아주 빠른 편이다. 어느 한 시스템을 배워서 손에 익을 때까지 슬슬 갖고 놀다가 뉘앙스를 배우는 순간을 좋아한다. 피아노가 그렇고, 그림이 그렇고, 언어 배우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이 모든 프로세스를 내가 통제해야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보다시피 내가 즐기는 거의 모든 활동이 개인플레이다. 공부/악기연주/그림 등등).


얼마 전에 나와 배우는 방법이 정반대인 의사를 한 명 만났다. 마취 전문의인데, 이 사람은 소리 정보는 본능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만 텍스트/시각 정보는 느리다고 했다. 그래서 마취과가 딱 적성에 맞다고. 환자 모니터 할 때 기기가 내는 소리가 자신에게는 각각 특색을 가진 악기들이 함께 내는 오케스트라 같다나. 그래서 뭔가 잘못 되면 곧바로 집어낼 수 있다고. 나에게는 비효율적이고 노이즈만 많은 소리세상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나에게 설명할 수 없게 다른 거다. 후각이 발달한 개의 세상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듯이.

내가 경험하는 세상과 그가 경험하는 세상. 동시대에서 같은 동네 살고 비슷한 일을 겪어도 그의 뇌와 내 뇌를 비교하면 짜파게티 vs 팔도 비빔면만큼이나 다를지도.

...비유 에러. 죄송합니다. 쏴리 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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