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2일
몇 초 몇 분의 느낌이 중요해서 당신에게 임신과 성병의 위험을 떠넘기는 남자가 뭐가 그리 믿음직하세요? 그 짧은 시간에 자기 조금 더 좋겠다고 인생을 해까닥 뒤집을 수 있는 임신의 위험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는데, 다른 상황에서는 당신을 더 고려해줄 것 같나요? 자기 '느낌' 손해를 잠깐이라도 못 보는 사람이, 시댁과 부딪히면 당신 편 들어줄 거 같아요? 밤에 아이가 울면 당신 대신 일어나 줄 것 같나요? 당신 경력 단절을 신경 써 줄 거 같나요? 아뇨. 앞으로도 자기 편한 대로만 살 겁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삶에 당신은 늘 그가 쓰기 편한 도구가 될 겁니다.
자신이 잠깐 좋기 위해서 당신이 매일 피임약을 챙겨 먹기 바라는 남자도 오십보백보입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조금 편하기 위해 당신이 시댁에 져주기를 바랄지 모르고, 자신의 성욕 때문에 당신이 입덧하는 중 업소 출입 할 수도 있겠죠. 자신이 육아하기 싫으니까 저녁에 일부러 야근할지도 모르고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죠. 너야 어쨌든 나는 좋고 봐야겠다는 사람입니다.
무슨 책임을 집니까? 책임감의 첫 단계는 책임질 짓을 안 해도 되도록 미리미리 책임감 있게 대처하는 거죠. 콘돔 끼면 임신 위험 확 줄어드는데, 그걸 안 하겠다는 남자가 과연 아이 생기면 책임감이 확 생길까요? 뭐, 낙태 비용 대주는 거요? 몇 분 좋자고 남의 인생 책임진다는 식의 허세 남발하는 남자, 정말 믿고 따르고 싶나요?
정말 책임지겠다는 남자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사귀는 남자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당신과 얘기를 했을 겁니다. 콘돔 싫다는 거 자체는 범죄가 아니지만, 그게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미리 합의 봤어야 하죠. 잠자리에서 헉헉대기 전에 이미 얘기 다 하고 결정 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걸 준비성 있다고 하고 책임감 있다고 하죠. 어쩌다 보니 그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요? 당신 아버지가 갑자기 방에 들어와도 그 남자는 스톱 못 할까요? 하겠죠. 당연히 스톱하고 나가서 콘돔 살 수도 있고, 그냥 관둘 수도 있어요. 안 하는 거죠.
딱 붙어 있는 사람이 아프다고 하는 상황입니다. 뭐 멀리 아프리카 고아들이 고생한다는 것도 아니고요. 나와 지금 당장 살 섞고 있는 사람이 아프다는데 지 좋다고 계속하는 놈은 소시오패스입니다. 더 가까워질 수 없이 끌어안고 있어도 당신이 아파하는 거 모르고 싫어하는 거 모르는 남자가, 과연 살면서 당신이 힘들 때 알아줄까요? 지가 아프게 하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지 좋은 것만 취하는데, 그 남자가 정말 당신 생각 조금이라도 해 줄 거 같나요?
성관계가 늘 황홀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남자가 백 퍼센트 책임지고 여자를 즐겁게 해야 한대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가 안색이 안 좋아도 안부 물어볼 수 있고, 지나가는 사람이 아파 보여도 신경 써줄 수 있는 건데, 연인 관계로 같이 관계를 하면서 즐기지 않는 것을 모른다면, 모른 척한다면, 관심이 없다면, 그리고 또 관계하자 조른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있어요. 관계가 싫으세요? 그럼 말 하세요. 그래도 강요하면 끝내세요. 당신의 몸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한 번만 싸대기 날리고 싶다고 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니겠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싸대기 한 대 맞고 끝나는 것과 성병, 임신의 위험을 안고 아프고 모욕적이고 싫은 성관계를 하는 것. 저라면 그냥 싸대기 한 대 맞고 끝내겠습니다.
성관계를 즐기고 싶나요? 신체 건강한 여자라면 대다수 가능합니다. 하지만 생리가 뭔지도 잘 모르는, 성교육이라면 포르노 야동이 대부분이었던 남자가 과연 알아서 잘 할까요? 나는 정말 사랑하는 내 남자와 좋은 성관계를 가지고 싶다 하면 같이 공부하세요. 오롯이 당신에게 속한, 당신만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육체입니다. 이 몸을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은지, 나는 뭘 좋아하는지, 뭐가 싫은지, 어떤 게 불편한지 연구해 보세요. 난 이런 거 아예 관심도 없고 싫다면 뭐 그것도 괜찮습니다만, 이것 역시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육체적 기쁨이고 사랑하는 이와 나눌 수 있는 경험인데 평생 이 몸 가지고 산 나도 잘 모르는 걸 타인이 알 거라고 기대했다가 아파하지 마세요. 혹시 내가 원하는 걸 말하거나 나도 즐기고 싶다 요구하면 천박한 여자, 닳고 닳은 여자로 보는 남자인가요? 그래도 결혼하시고 싶으세요? 평생 내가 어떤지는 관심도 없고, 자기만 좋으면 땡이라는 남자와의 불편하고 재미없는 부부관계 당첨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같이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남자를 찾으세요. 이건 정말 기본적인 거잖아요. 책임감이 뭔지도 이해 못 하면서 남발하고, 지만 좋다면 당신의 고통 따위야 야동 세팅으로 즐기는 소시오패스에게 제발 이용당하지 마세요.
덧: 글 올리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양파님 글은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하고 성생활을 시작하는 시기의 여성에게는 꽤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성교육용이라면 그게 맞는 거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죠.
하지만 생각하시는 것보다 한국의 현실은 훨씬 더 끔찍해요.
데이트의 상황만 말씀하셨지만 기혼자의 경우에도 아이를 갓 낳은 부인에게 어차피 수유기에는 임신 안 되는 거 아니냐며 콘돔을 거부하고, 수유를 하느라 피임약을 먹지 못하고 시술을 받지 못하는 부인을 두고도 콘돔을 쓰고 싶지 않다는 남편이야기를 부지기수로 듣곤 합니다. 이 나라의 남자들은 결혼이란 내 마음대로 다 해볼 수 있는 평생 쿠폰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대놓고 부인에게 결혼해서 가장 좋은 게 매일 맘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고 (진심으로) 말해도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입니다.
이럴 때도 갓 태어난 아기를 놔두고 헤어져야 할까요?
댓글에서도 말씀하신바 대로 한국에서는 데이트 직후에 섹스가 시작되기보다 상당히 감정이 깊어진 경우에 성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이 옳지 않은 것을 알아도 감정이 깊어지면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듭니다. 게다가 지인들 간에서 연애를 시작할 경우 연애가 깨진 것만으로 걸레, 헌 여자 취급은 기본입니다. 연애 두어 번으로 학교를 휴학하거나 자퇴는 물론 심지어 직장까지도 자의가 아닌 채로 나와야 하는 일이 허다한 게 한국이에요. 사내 연애 자체를 금지하는 회사에서 차인 남자가 보복 투서를 하는 경우는 뉴스에도 나올 내용도 안 되는 나라에요. 이런 나라에서 그렇게 연애를 아니다 싶을 때 그만두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들의 자존심과 기 살리기를 아들 양육의 목표로 삼고 자라난 한국 남자들은 자신이 문제가 있어서 연애에서 차였다는 것을 그렇게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경우가 오히려 소수입니다. 스토킹 깽판 정도는 귀여운 정도고 보복 폭력, 리벤지 포르노도 역시 아주 흔한 일입니다. 여자 인생 버리겠다고 직장, 주변인에게 루머를 퍼뜨리는 일은 신기하지도 않아요. 연애를 깬다는 것에 안전 이별이라는 말이 우스개가 아니라 여긴 정말 그렇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입니다.
이론적으로 양파님 말씀 다 옳다고 생각하고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올리신 글 때문에 상처받을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모자라서 말씀하시는 걸 몰라서 못 헤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내가 안전한지 그것 때문에 못 헤어진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