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Jun 05. 2018

'김치녀'를 제대로 없애는 방법

2016년 12월 20일

이 단어 자체 무지하게 혐오스럽지만 우선 참고.     


남아공의 흑인 결혼에 대해서 잠깐 썼었다. 남자는 결혼할 때 여자의 가족에게 가축 한 마리 (요즘엔 현금!)를 주는 문화가 있다. 물론 이건 미풍양속이니까 여자를 사는 대가는 아니라고들 하고, 여자의 가족에게 감사의 표시라고 한다. 그렇지만 곧 여자 값 취급받았다. 사람은 어느 환경에서나 자신을 다른 이에게 비교를 하기 마련이고, 타인보다 조금 낫다 싶으면 기뻐한다. 그래서 남아공 흑인 여자들은 누가 얼마의 로볼라를 치렀냐에 대해 뒷이야기가 많다. 누구는 정말 예뻐서 소를 세 마리 받았다고 소문이 자자하고, 누구는 늙고 안 예쁘니 로볼라 얼마냐는 질문에 우물우물한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찍어 누르려다 생긴 악습이라기보다는 여자가 재산으로 취급되던 시절, 남자의 경제력에 완전히 의존해야 하던 시절, 가부장적 시스템의 부작용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 시스템 안에 사는 사람은 그것을 체화한다.     


한국에는 '집'이 로볼라다. 그런데 이것도 남녀 커뮤 사이에 차이가 많이 보인다. 남자 커뮤에서는 집을 요구한 김치녀 이야기, 집이 없어서 장가 못가는 남자의 눈물겨운 사연이 주로 올라오는데 여초 커뮤에서는 집값 반반이 상당히 많고, 그나마 모자란 돈은 대출해서 맞벌이로 갚는다는 얘기가 많다. 그러나 익명이 보장되지 않은 오프라인 여자 커뮤에서는 또 남자가 소 몇 마리, 아니 집 몇 평을 해왔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건 아마도 거의 다 사실일 것이다. 그저 화자가 누구인가, 누구를 신경 쓰고 말을 하느냐의 차이일 뿐.     


여자의 유일한 가치는 남자가 지불할 금액으로 결정된다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여자도 집값을 냈다'가 자랑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은 곧 "안 예뻐서/늙어서/데려갈 사람이 없어서/그 외 말할 수 없는 가치 절하의 이유로 여자가 아쉬워서 돈까지 쥐어 억지로 떠넘겼다"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면 "남자가 능력이 없어서 여자의 진짜 값을 내지 못했다"로도 된다. 여기서 여자가 얼마나 공부했고 어떤 사람이고 뭘 이루었고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그렇다면 부모 입장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할 때, 우리 잘난 딸이 이렇게 시집을 잘 갔다는 걸 강조하려면, 여자의 기여도는 확 낮추고 남자의 기여도는 확 높여야 한다. 실제로는 반반에다가 혼수 예단까지 치면 친정에서 훨씬 더 냈더라도, 주위 사람들에게는 남자가 다 해온 걸로 말을 해야 남자도 얼굴이 서고 여자도 얼굴이 선다. 남자는 능력남이 되고 여자는 그만한 가치를 지불할 만한 여자가 되기 때문이다. 익명 커뮤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냥 그대로 얘기가 나오거나,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남자가 나에게 이딴 식으로 한다'의 내러티브를 완성하기 위해서 여자의 기여도를 높일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예외는 남자의 가치가 월등히 높아 여자도 값을 치러야 한다는 동의가 있을 때이다. 사짜 신랑에게 시집갈 때 돈을 왕창 싸간다던가 등등.    

 

남자의 입장에서도 잘 버는 여자, 돈을 많이 가져오는 여자는 개인 레벨에서는 좋겠으나, 그래도 체화된 시나리오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남자가 크게 성공해서 그 성공에 맞는 (능력 무관의) 예쁜 여자를 쟁취하는 것이다. 요즘 경제가 영 불황이다 보니 최고 선호 시나리오보다 실속을 택해서 맞벌이 여자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만, 남자의 수입이 몇억 대로 늘어나면 빡세게 돈 버는 능력녀보다는 차라리 겁나게 이쁘고 내조 잘 할 여자를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 (해외도 그런 경우가 많다. 남자 성향에 따라서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그러므로 김치녀는 사실 남자가 원하는 관계 속의 여자다. 내 돈으로 사치하는 예쁜 여자. 내가 엄청나게 능력 있다면 아마도 내 옆에 있을, 능력 없는 남자는 넘보지 못할 여자. 물론 처음 만날 때는 아주 드라마틱하게, 남자의 재산을 전혀 모르고 만났다가 '어머 유아 쏘 리치!' 하며 행복한 웃음을 짓고 그 다음부터 남편에게 감사하면서 돈 쓰겠지만 어쨌든 결과만 보면 그들이 그렇게 욕하는 김치녀.


이것은 여자에게도 큰 딜레마이다. 여자의 직업, 여자의 꿈, 여자의 성취보다 그녀를 선택하는 남자가 훨씬 더 여자 가치의 끝판왕이라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뒤웅박 팔자. 여성의 사회 진출이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부모 빽 아니면 일생 한 번의 기회 결혼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자 의사라 해도 남자가 집을 해오지 않았다면 '시집 못 간'게 된다.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위의 시선이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여자가 뭐가 문제가 있나?"로 간다. 게다가 우리는 모든 것의 수치화가 엄청 단순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얼마'로 다 계산된다. 그 남자가 널 사랑해? 얼마짜리 해줬어? 물론 다 부자는 아니니까 좀 더 유연하게 해서, 그 남자는 소득의 얼마를 너에게 써? 시간의 얼마를 너에게 투자해? 이렇게 쉽게 흐른다. 누군가를 좋아함을 그런 수치로 재게 되면 더 큰 문제가, 감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자가 백만 원짜리 선물을 사줬다. 그냥 친구 사이라면 어머나 세상에 뭐 이런 엄청난 선물을?? 하겠지만, 사랑을 수치로 재는 시스템에서는 "이 남자는 백만 원짜리 선물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구나"가 된다. 여자의 가치가 그만큼인 것이다. 그런데 나도 백만 원짜리 선물을 해줬다면? 선물과 지출을 '대가'로 보는 사회에서는 100-100=0이다. 그러니 감사도 없고 기브앤 테이크도 없다. 계속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증표가 되니까. 나의 가치를 증명해 주니까. 내가 해주는 건 내가 아쉽다는 증표로, 선물이 끊기는 것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비약된다.     


이렇게 뒤틀어진 사회에서 진짜 김치녀가 탄생한다. 나는 예쁘기 때문에 시장 가치가 있고, 그러므로 남자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가부장 제도를 완벽하게 체화하고 여자의 가치를 100% 남자의 능력으로 결정하는 시스템이 뇌에 굵게 새겨진 여자다. 그러므로 받아도 감사는 없다. 지불한 가격의 보답은 '내가 만나주는 것'이다. 이의 완전 반대는 '헌신하다가 헌신짝 되는 헌신녀'가 있다. 남자 고시 뒷바라지를 하다가 버림받은 여자 역시, '남자가 시장가치가 있고, 그러므로 여자는 헌신으로 대가를 지불했다'가 된다. 김치녀가 선물 받았다고 계속 사귀어줄 필요가 없듯이, 고시 합격 남자 역시 헌신 다 받아먹고 나를 수 있다. 김치녀와 조강지처 배신남(이것 보소, 조강지처 배신남한테는 딱 입에 맞는 찰진 욕도 없음)은 둘 다 가부장제도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고, 그래서 그에 따른 당연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김치녀가 싫은가? 여성의 가치를 남자가 매기지 않는, 여자의 결혼으로 여성 인생의 성공 불행을 판단하지 않는 사회가 오면 된다. 예쁘고 젊은 여자는 대접받는 게 당연한 분위기가 없어지면 된다. 결혼과 임신 출산이 경제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아서 결혼 상대로 남자의 경제력을 고려 안 해도 돼야 한다. 그러므로 그렇게 원한다는 김치녀 퇴치는 페미니즘의 성공으로 가능하다. 김치녀 욕할 시간에 여혐타파에 힘쓰자고요.     


덧1: 

그나저나, 여자 뒷바라지와 헌신 홀랑 빼먹고 튀는 남자 욕하는 단어 진짜 없나요? 


덧2: 

한국 자체가 줄 세우기를 워낙 하는 나라라서 대접 바라는 자세를 없애는 건 힘들 것 같기도 하다 (이전에 쓴 글 갑질의 나라 여기 링크

https://www.facebook.com/seattleyangpa/posts/1831803640438448

https://brunch.co.kr/@yangpayangpa/290

덧3: 

김치녀라는 말이 나온 배경은 무시하고, 여자들이 처한 상황도 외면하면서 '날 만나주지 않고 다른 돈 많은 남자 만나서 펑펑 쓰는 여자', 혹은 '여자가 돈 저렇게 잘벌리 없으니 분명히 남자 등쳐서 쓰는 것 같은 여자'만 욕하는 남자면 '김치녀란 단어 쓰는 남자 만나지 말자'조언 유효하다. 아니 세상에 좋은 남자도 많은데, 여혐이 너무나 기본으로 장착되어서 여자 앞에서도 그런 비하 단어 쓰는 남자를 왜 사귐? 한국사람 비하하는 외국인이랑 일부러 사귈 이유 없고, 전라도 사람으로서 일부러 전라도 비하하는 경상도 사람 만날 필요 없지 않소? "난 전라도 사람이지만 네가 욕하는 전라도 사람이랑 다르고 너한테 무척 잘 할 거야"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매거진의 이전글 잠재적 아군인 나라는 남자랑 사귀지 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