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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y 30. 2018

뇌는 공유가 되지 않는다.

2017년 1월 10일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보니까 아주 예전에 이걸 포기했던 이유가 생각나서.     


뇌는 공유가 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참 사람 외롭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그리고 결국은 삶에서 여러 가지를 포기하게 만든 이유다. 너는 너. 나는 나.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나는 알 수 없고,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당신 역시 알 수 없다. 내 마음의, 내 생각의 완전한 공유가 불가능하다. 언어로 어느 정도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절절하게도 제한된 방법이다. 내 머릿속의 '고국'은 당신의 '고국'과 다르다. 내가 '어머니'를 말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와 당신의 '어머니'는 다르다. 일반적인 명사가 이 지경인데 추상명사로까지 확대되면, 인간들 사이의 대화는 의미가 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진실로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내가 넘겨짚는 것은 내가 미디어에서, 주위 사람들에게서, 삶의 경험에서 얻어온 단편적인 지식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얻은 결과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 가치관이 아주 크게 관여한다. 내가 외모에 신경을 쓰면 난 다른 사람도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쓸 거라고 생각해서, 내 머리에, 내 얼굴에, 내 화장에, 내 옷차림에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의미 없다. 뇌는 공유가 안 되고,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의 진실은 나는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 예쁘고 멋진 모습이라는 것 자체가 수십억 인구 뇌 안에 각각 다른 콘셉트일 것이고, 내가 선택한 예쁘고 멋진 모습은 지구 인구 백 퍼센트가 사랑하는 모습이 되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들이 부러워하는지,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비웃는지, 질투로 인해 안 좋은 생각을 하는지도 난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그 '부러움'을 관찰하고 그에 기뻐하는 것은 내 뇌다. 공유 안 되는 내 뇌. 그러므로 공대녀의 효율성 엔진으로 보자면, 그 여러 명을 설득시켜 내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그냥 내 뇌 하나 어떻게 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 거울 보고 나는 이뻐! 멋있어! 사람들이 부러워할 거야! 라고 세뇌!     


그런데 그렇게 말하자면 페미니즘 운동은 왜 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바꾸는 것보다 그냥 내 뇌 하나만 훈련시키면 되잖소? 그냥 여자로 사는 게 그런 거 다 받아들이고, 소위 말하는 '개념녀'에 나 자신을 맞추는 게, 세상을 바꾸려는 것보다 효율적이지 않소?     

맞다. 내가 착각하고 내가 혼자 합리화하는 게 훨씬 더 쉽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세상이 이모냥이다. 착각으로 평생 버틸 거 아니면 내 기분을 위한 효율성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효율성도 따져야 한다. 세상 사람들을 날 사랑하게 하는 건 힘들지 몰라도, 우리의 작은 행동 몇 개로 사회의 분위기를 약간이라도 바꾸는 것, 그렇게 해서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뇌는 공유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같이 공유하는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게 조금은 덜 외로워진다. 덜 답답해진다.     


불완전한 소통임에도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저도 덜 외롭습니다 :)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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