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0일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보니까 아주 예전에 이걸 포기했던 이유가 생각나서.
뇌는 공유가 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참 사람 외롭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그리고 결국은 삶에서 여러 가지를 포기하게 만든 이유다. 너는 너. 나는 나.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나는 알 수 없고,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당신 역시 알 수 없다. 내 마음의, 내 생각의 완전한 공유가 불가능하다. 언어로 어느 정도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절절하게도 제한된 방법이다. 내 머릿속의 '고국'은 당신의 '고국'과 다르다. 내가 '어머니'를 말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와 당신의 '어머니'는 다르다. 일반적인 명사가 이 지경인데 추상명사로까지 확대되면, 인간들 사이의 대화는 의미가 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진실로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내가 넘겨짚는 것은 내가 미디어에서, 주위 사람들에게서, 삶의 경험에서 얻어온 단편적인 지식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얻은 결과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 가치관이 아주 크게 관여한다. 내가 외모에 신경을 쓰면 난 다른 사람도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쓸 거라고 생각해서, 내 머리에, 내 얼굴에, 내 화장에, 내 옷차림에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의미 없다. 뇌는 공유가 안 되고,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의 진실은 나는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 예쁘고 멋진 모습이라는 것 자체가 수십억 인구 뇌 안에 각각 다른 콘셉트일 것이고, 내가 선택한 예쁘고 멋진 모습은 지구 인구 백 퍼센트가 사랑하는 모습이 되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들이 부러워하는지,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비웃는지, 질투로 인해 안 좋은 생각을 하는지도 난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그 '부러움'을 관찰하고 그에 기뻐하는 것은 내 뇌다. 공유 안 되는 내 뇌. 그러므로 공대녀의 효율성 엔진으로 보자면, 그 여러 명을 설득시켜 내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그냥 내 뇌 하나 어떻게 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 거울 보고 나는 이뻐! 멋있어! 사람들이 부러워할 거야! 라고 세뇌!
그런데 그렇게 말하자면 페미니즘 운동은 왜 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바꾸는 것보다 그냥 내 뇌 하나만 훈련시키면 되잖소? 그냥 여자로 사는 게 그런 거 다 받아들이고, 소위 말하는 '개념녀'에 나 자신을 맞추는 게, 세상을 바꾸려는 것보다 효율적이지 않소?
맞다. 내가 착각하고 내가 혼자 합리화하는 게 훨씬 더 쉽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세상이 이모냥이다. 착각으로 평생 버틸 거 아니면 내 기분을 위한 효율성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효율성도 따져야 한다. 세상 사람들을 날 사랑하게 하는 건 힘들지 몰라도, 우리의 작은 행동 몇 개로 사회의 분위기를 약간이라도 바꾸는 것, 그렇게 해서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뇌는 공유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같이 공유하는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게 조금은 덜 외로워진다. 덜 답답해진다.
불완전한 소통임에도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저도 덜 외롭습니다 :)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