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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08. 2018

무기력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2017년 2월 17일

둘째를 낳고 나서 수면 부족 6년 차에 들어서던 해부터인가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졌었다. 내가 아무리 직장 일은 땡땡이치더라도 (...) 쓸데없는 공부는 절대로 멈춤이 없던 인간인데, 더 이상 가계에 도움 1원도 되지 않은 언어들을 배우지도 않고, 책 읽기도 그만두고, 그나마 없던 야망까지 더 없어졌다. 직장일 끝나고 집에 오면 야아~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의욕이 넘치던 내가, 퇴근 후 피곤해 뻗거나 요리만 해댔다. 생각이 하기 싫었다.   

성격도 많이 변했다. 원래도 자존감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겁은 없어서 '들이대 보고, 아님 말고' 정신으로 지금껏 살아왔는데 도전 정신 또한 없어졌다. 장점이라면 글쎄. 기억력이 그나마 더 나빠져서 자괴감 느끼는 사이클이 짧아진 거?     


어쨌든. 그러던 중에 접한 이야기 둘.


왕성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성질 급하던 남자가 여행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식물인간 급으로 모든 흥미와 의욕을 잃었다. 어떤 한 저명한 학자는 60세 어느 날 아침 급작스레 연구를 그만뒀다. 이들은 음식에도 흥미를 잃었고,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다. 씻지도 않고 자리도 옮기지 않았지만 시키는 간단한 일은 한다고 했다. MRI를 찍어보니 결과 뇌의 한 부분 (striatum, 선상체)에 아주 작은 그림자가 보이거나 작은 혈관 손상이 있었다고 한다(이건 Charles Duhigg의 책, Smarter Faster Better).   


두 번째. 아주 심한 우울증으로 하루 종일 벽만 바라보고 음식도 먹지 않는 정도로 무기력한 이들에게는 ECT가 잘 통한다고 한다. 호러 영화에서 하도 자주 나오는, 뇌에 전기충격을 주는 방식이다(Adventure in Human Being, Gavin Francis).


내가 아무리 향학열이 식었다고 하지만 선상체 혈관 파손 정도는 아닌 거 같고, ECT 전기충격 요법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전과 차이는 있다. 어디서는 나이 30대 후반이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뇌가 된다고 한다(이건 무슨 뇌 과학 책에서 한참 전에 읽었는데 어디서 읽었는지 생각이 ㅡㅡ). 예전에는 10대 출산이 흔했으니 30대 후반이면 손주 손녀를 볼 나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이 때문인가? 아니면 출산? 아니면 수면 부족?? 그리고 30대 후반이면 오히려 더 왕성하게 일하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던데, 난 뭐지??     

...라고 고민하다가. 아니 뭐 공부하는 건 시들해졌지만 페북 열심히 하잖아 페북!! 글 계속 쓰잖아!!! 라는 자기 합리화로 끝났다는 모 아줌마의 이야기다.     


* 지난 3년 정도 책 완전히 놓았었다 믿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킨들로 꽤 읽어대긴 했다. 그래도 내 주 종목은 씰데없는 공부, 온갖 인문학 과목 듣기, 온라인 코스 하기였는데 그걸 완전히 그만뒀다. 대신 요리력은 올라갔고 운동 늘었고 청소 좀 더 늘었으니 무기력증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머리 쓰는 일 대신에 몸 쓰는 쪽으로 바뀌었다.     


** 브렉시트 이후로 무기력, 무야망이 한층 더 심화되었다. 미래가 엄청나게 불투명해졌다는 느낌에 벌어봐야 뭐하나, 이 세상 어찌 되려고 이러나 하며 남편과 쌍으로 몇 달을 허우적거렸다. 지금도 그리 나아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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