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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09. 2018

마초들과 나

2017년 2월 19일

로맨스에서 마초 주인공이 하는 행동들, 그리고 그걸 좋아하는 여주들을 보면서 아 정말 마초와는 안 맞는다 생각 자주 한다(사족으로, 로맨스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남자들은 이런저런 유형을 마구 섞어서 현실성 없는 캐릭이 많았다. 물론 남성향 서사에서의 여자 캐릭터도 그러하다.) 주위에서 파트너가 몰래 여행을 계획했다던가, 비싼 선물을 사줬다던가,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던가 하는 걸 볼 때, 그리고 그 행동으로 파트너의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해하는 걸 보면 난 진짜 연애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말 안 하고 놀라게 해주는 이벤트 중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은 레스토랑 예약 정도다. 그래, 그 정도 위험은 내가 감수해준다. 그래도 이전에 미리 나에게 의논하고 하는 편이 나았겠지만, 그 정도는 '참아'준다. 깜짝 선물 역시 십만 원 이하라면 '참아'준다. 예전 남친이 '나 보고 싶냐'길래 예의상 '응' 했더니 새벽에 두세 시간 걸어서 내 창문 두들긴 적 있었는데 레알 패 죽이고 싶었다. 너 맘대로 하지 말고 말을 하라고 말을. 

    

현실성 없는 캐릭터 얘기 잠깐 했었는데 개념녀가 그러하다. 따지자면 나도 개념녀 범주에 들겠다. 사귈 때나 결혼할 때 남자 돈 능력 하나도 안 봤고, 당연히 남편은 집을 안 사 왔고, 보석·가방· 신발 이런 선물 바라지 않고 진정으로 그런 선물 좋아하지 않는다. 돈 잘 안 쓴다. 그렇지만 개념녀가 말 안 되는 이유는 맘에 드는 부분만 오려붙여서다. 난 내 생활에 간섭하고 내 취향을 넘겨짚으며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주는 거 존나 감동적이지 않냐?' 하는 게 싫은 거고, 전통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 표현하는 방식을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비싼 선물 바라지 않지만 작은 선물에 감동하지도 않는다. (난 그냥 선물이 싫어!!) 남자가 알아서 챙겨주는 거 바라지 않지만 나도 안 챙긴다. 부탁하면 최대한 들어준다. 부탁도 안 한갓 내가 괜히 무리해서 마음 쓰고 고민하지 않는다. 남자 능력에 연연하지 않았으나 같은 맥락으로 잘 나가는 남자/시댁 만나서 대접해줄 마음도 없다. 엄청 바쁜 사업가 남편 관심 없다. 아주 대단하셔서 내조 바라는 남편은 필요 없고, 내가 내 생활하는데 그 일상을 공유하고 나눠 할 친구 같은 사람을 늘 원했다.     


개념녀라는 이미지를 분석해보면 나는 돈 많은 마초들처럼 과시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이 과시했을 때 받을만한 관심은 받고 싶다는 게 포인트다. 나는 비싼 거 못 사주지만 여친은 감동했으면 좋겠고, 내가 돈을 못 버니까 여자도 돈 벌었으면 좋겠으나 그래도 내조는 해 줬으면 좋겠고, 며느리와 아내로서의 일은 해 줬으면 좋겠고 등등. 성평등 추구를 위해 (...) 여자 로망도 까자면 남자 주인공은 여자가 원할 때는 여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참견하지 않지만 여주가 힘들 때에는 완전 마초로 돌변해서 '오빠만 믿어', 'I got this' 이런 식으로 일을 해결해준다. (Knight and Day에서 톰 크루즈가 이 말 하던데, 서구 여자들이 독립적이네 어쩌네 해도 '오빠 믿어'식의 'I got this' 좋아하는 여자 넘친다). 

내가 하고 싶은 걸 막는 건 마초 짓이지만 내가 어려울 때 오빠가 와서 묵묵히 처리해주는 거는 남자다움, 기댈 수 있음, 그런. 어릴 때는 그것도 아주 고깝게 봤었다. 옷차림 가지고 남친이 간섭하는 거 싫으면 누가 나에게 싫은 말했을 때 남친이 오지랖 넓게 나서서 해결하려는 것도 싫어야지. 그 남자, 너 일찍 들어오라고 윽박지르는 심리로 '내가 알아서 할게 너는 걱정하지 마' 하는 건데, 나한테 유리한 것만 좋아? 보시다시피, 저도 한때는 쌈닭이었습니다.     


머리 좀 굵어지고 보니 사랑하는 방법, 사랑받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더라. 내가 나를 위해 하는 관심의 행동을 간섭으로 보고 싫어하는 것이 독립적으로 보이고 싶은 코스프레가 아니듯이, 파트너가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면 감동하고 좋아하는 것 역시 의존적인 약함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행복한 것이고, 그렇게 상대를 위해 몰래 준비하고 선물하고 상대방이 좋아하면 행복해하는 걸 꼭 삐딱하게 볼 필요도 없더라. 개념녀나 로맨스 남주처럼 내가 원하는, 좋아하는 방식으로만 취하고 요구하겠다는 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좋아서 해주는 게 왜 싫어?' 란 이들에게 답하자면 - 어느 날 누가 몰래 나를 다른 집으로 이사시켜놨거나, 나 몰래 직장에 사표 내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하자. 이런 정도의 간섭을 반갑게 맞을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깜짝 휴가' 역시 이 레벨에 해당하는 거고, 다른 이에게는 조금 비싸거나 정성 들인 선물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고 그냥 사랑받는 느낌 들게 되는 이벤트인 거고.     

개념녀란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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