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Jun 15. 2018

아버지의 여혐 발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2017년 10월 17일

이 글은 사이다 글이 아닙니다. 어쩌면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글이고, 저의 엔지니어 감성이 극하게 드러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 글의 제목은 "아버지의 여혐 발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입니다. 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치마를 입냐고 잔소리하시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요.

이런 상담 올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은 - 말 한마디로 사람을, 특히 나보다 윗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라는 겁니다. 박사모 사람이 저에게 와서 어떻게 말을 하면 한마디로 박근혜 지지자로 만들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돈 1억 주겠다면 지지하는 척이라도 하...흠. 어쨌든 -_- 상대방에게 말이 안 통할 때 우리가 택하는 선택도 봅시다. 우리는 보통 그 사람을 무시하고 피하거나 차단하고, 뒤에서 욕하고, 애정이 가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설득해보려고 합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겠죠.     


그런데 가족은 차단이 힘들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 보통 내가 원하는 게 뭔지부터 파악합니다. 


1) 아빠가 저렇게 말하는 게 싫다 

2) 아빠가 저런 사람인 게 싫다 

3)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내 처지가 싫다


뭐 등등 있겠죠. 여기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은 2) 입니다. 아빠가 그런 사람인 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나에게 그런 말을 안 하도록 하거나, 나에게 안 들리게 하는 방법은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내 영향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그 정도입니다. (사실 아버지를 실제로 바꾸게 하는 방법은 아버지 또래 집단을 세뇌시키거나, 아버지 또래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지 보여주거나, 경쟁의식을 느끼게 하는 건데 이건 좀 힘드니까 우선 넘어가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좀 비굴하고 타협하는 것 같지만 대화의 기술에 의지합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아버지가 좋은 사람임을 가정합니다. "애들 가르치는데 왜 치마를 입냐?" 라고 잔소리합니다. "공부하는 남학생들 자극하니까 안 된다. 치마는 남학생들을 자극하는데 니가 그걸 입으면 애들이 자극받아서 어떻게 공부하냐. 원래 남자들이 자극을 받는다. 그러니까 니가 치마를 입지 말아야지." 라고 하시네요. 그런 생각을 하는 남자애들이 이상한 거라고 말씀드리면 원래 남자들이 그렇다며 남자애들은 원래 이상하니 니가 피해야 한다는 논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실 여기서 의견 충돌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남자애들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치마를 입으면 이런 결과가 나올 거다 라고 말하시는 거고, 딸은 그런 남자애들이 이상하다고 답하죠(하지만 그런 남자애들이 없다는 말은 안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남자아이들이 충분히 많으니 위험이 있다'라는 논리고, 딸은 '그런 아이들은 소수이거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무시하겠다'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걱정이 되어 잘 모르는 너에게 가르침을 주겠다" 입니다. 사실 이것만 받아들이고 칭찬해줘도 순해집니다.     


아버지가 아무래도 남자니까 더 잘 아시겠죠 (네가 더 잘 알 수도 있다 인정)

그리고 그런 남자애들도 아마 많을지도 몰라요 (그 외의 주장도 가능성 있음 인정)

아빠가 걱정되는 것도 이해하고요 고마워요 (잔소리의 의도를 받아들이고 감사)   

  

여기까지 가면 많이 누그러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지만" "그래도" 이런 말 한마디 하면 도루묵입니다.     


"그런 남자애들 많을 수 있는데, 그렇다고 내가 겁먹고 치마 입으면, 다른 치마 입은 여자들이 더 피해보지 않겠어요" -> 아버지 논리를 반박하는 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반박.     


혹은     


"그런 남자들이 많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입고 싶은 거 입는 게 당연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 역시 아버지 의도나 논리를 반박하지는 않고 자신의 의도 피력     


혹은.     


"아버지 말이 맞는 거 같지만 세상의 남자가 정말 다 그렇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괜찮은 적도 많았고, 걔들도 평생 치마 입은 여자 안 볼 거 아닌데, 그냥 제가 입고 싶은 거 입고 갈래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잠재적 성추행범으로 보는 것도 비극적이잖아요. 아빠도 제가 애들 가르치면서 얘들이 나 가해할까 걱정하는 건 원하지 않으시잖아요."     

물론 이건 아버지가 좋은 분이라고 가정했을 때, 말이 좀 통한다고 했을 때 말입니다. 아버지 성향에 따라서 좀 치사한 방법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권위에의 호소 (...) 뫄뫄대 뫄뫄 교수님이 그랬는데.. 어쩌고. 혹은 경쟁심 유발을 위한 친구 아버지 소환. 혹은 협박. "아빠 그런 식으로 내가 남자 볼 때마다 나쁜 놈으로 보면, 나 남자 혐오 생겨서 시집도 못가" 등등.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분이면 그냥 피하는 게 좋습니다 (...) 내 멘탈은 소중하니까요.     


결론. 

누군가를 반박할 때, 그 사람의 의도 - 보통은 내가 이렇게 많이 안다, 혹은 내가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는 생색, 뭐 등등을 만족시켜주고 '너 틀렸어!' 란 말만 직접적으로 안 해도 많이 수그러듭니다. yes but 이란 말투, 그러니까 "네가 맞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고생해서 모은 호의 한방에 날리지 마시고요,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인정 욕구가 충족되도록 인정해주고,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알겠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까 내가 슬프다. 내가 비관적이 된다. 다른 식으로 말해주면 더 좋겠다는 식으로 바꿔주는 쪽이 조금 더 효과가 좋았습니다.     

최대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찾아내자...는 양파의 공익방송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와 여자 차이 분명히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