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Jun 16. 2018

내 인생에서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2017년 10월 30일

매년 30만 명의 정신질환 환자들이 실직한다고 한다. 영국 얘기다. 정신질환이라면 뭔가 무서운 증상 떠올리는 이들 많은데, 우울증은 흔하다 못해 언제 겪었냐가 더 맞는 질문이 아닌가 할 때도 있다. 최소한 내 주변에서는, 20년 전보다는 훨씬 더 우울증 등에 대한 사회 인식이 많이 변했다.     


사람들이 보통 정신질환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종류와는 거리가 멀지만 내 인생에서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일 할 때 힘들기도 하니까 얘기하자면.     

난 주의력 조절을 못하는데 이걸로 몇 번이나 진단 받았어도 약 먹는 건 싫어했다. 철이 안 들어서, 내 자신도 컨트롤 못하는 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이 아주 깊게 박혀있어서 그렇다. 내가 주의력 문제 있다고 해도 날 만나는 사람들은 잘 안 믿는다. ADD는 만들어낸 질환이다, 그냥 자기 통제를 안/못 하는 거다, 충동적인 거다, 조금만 신경 쓰면 된다 등등의 말을 쉽게 한다. 좋게 말하려는 사람은 너 괜찮아 보이는데 뭘 그러냐, 그래도 직장 잘 다니고 잘 살잖아라고 한다.     


난독증 환자 중에 정말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몇 있다. 그중 한 명 미국의 한 유명한 변호사는 글을 못 읽어서 그냥 다 외운단다. 엄청난 기억력으로 극복한 케이스다. 나 역시 평생 주의력 결핍으로 살다보니 나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이 있다. 공부는 독학. 뭔가 하고 싶을 때는 그냥 최대한 빨리 그거 해버리고, 이거저거 여러 개 벌려놓고 돌아가면서 한다던가. 내가 정말 집중력만 있었다면 뭐라도 했을 거라 늘 한탄하지만, 내가 해낸 것 역시 ADD인 내가 내 방식으로 살아남으려다 보니 어째어째 한 거라서 ADD 없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내 정체성의 반 이상이 ADD라서 그렇다.     


기억력이 없고 듣는 건 기억 잘 못 하지만 보상 메커니즘으로 난 읽어 이해가 빠르고, 그냥 독학으로 공부한다. 기억이라는 것이 뇌의 회로를 지져놓는 건데, 난 그게 없는 대신에 상당히 창의적이다. 미팅에 집중 못 하는 뇌는, 바로 그 이유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는 데에 유용하다. 당장 집중해야 하는 거엔 못 하지만, 대신에 이거저거 잡다한 곳에 빠지다 보니 잡학이 많고 뭘 해도 엄청 빨리한다. 마무리는 잘 못해도 아이디어 내서 진도 확 빼는 건 잘 한다. 그러니 Lord giveth and lord taketh. 동전의 양면. 칼의 양날. 그 뇌가 그 뇌. 걔가 걔.     

주의력 없다면 흘려듣는 이들이, 아이러니하게 묻는다. 글을 언제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쓰세요? 미팅 중에 집중 못하고, 누가 말하면 집중 못하는 게 생각하느라 그렇다. 늘 생각으로 바쁘다. 그리고 빨리 안 쓰면 계속 머리가 어지러워서 얼렁 적어두는 게 속편하다. 그렇게 10분, 20분 생각을 글로 다운로드 하는 것이 내가 직장에서, 어지러운 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사족으로, 내가 글 쓰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 역시,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제일 경멸하는 주의력 조절 실패의 증거라 그렇다)     


ADD인 나는, 뇌 회로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이리 저리 튀는 나는, 그 때문에 글을 쓰고 쓸데없이 잡학다식하다*. 그렇지만 다행히 ADD와 곧잘 엮이는 충동성은 없다. 우울한 적은 있지만 우울증은 겪은 적이 없다 (이것도 어느 정도 집중력과 기억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 아닌가 하는 셀프 진단을 -_-). 난독증도 없고 분노조절 장애도 없으며 그 외에 인생 힘들게 하는 정신 질환은 없다.     

(사실 다른 주제로 글 쓰려다가 분량 조절 못해서 짧게 자르면서 내용도 산으로 갔지만 어쨌든)     


* 기억력이 두 가지라고 한다. Episodic memory / system memory. 난 읽어서, 공부해서, 분석해서 이해하는 기억력은 괜찮은데 일상 기억력이 아주 약하다. 했던 얘기, 갔던 곳, 만난 사람들, 사람들과 있었던 일 이런 걸 잘 기억 못한다. 이 글도 아마 내 블로그에서 몇 번이나 썼을 거다. 주위 사람에게 했던 말 또 하고 그런다. 청력 기억이 최고로 약해서, 누가 말로 뭘 시키면 극악이다. 강의는 그냥 포기. 대신 듣기 싫은 소리 무시하는 데엔 아주 유용하다.     


* 메멘토 영화 보면서 나 좀 더 나이 들면 저렇게 될라나 했었다. 안 좋은 일이 있거나 하면 그 순간에 결정을 한다. 이거 기억할까 말까. 기억 안한다고 결정 내리면 뭔가 딴짓을 하거나 뉴스를 찾아본다. 이때의 느낌은 푹신한 소파에 스르르 앉는 느낌이다. 정말 빡쳤더라도 천천히 안정되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15분이 지나면, 역사책에서 전쟁 얘기 보는 것처럼, 내용은 기억을 하는데 감정적인 반응은 사라지고 없다.     


* 기억력 나쁜 거 이용 2번. 쇼핑할 때 '내일도 이거 사고 싶은 생각나면 사자'라고 하면.. 99.9% 그 다음날 기억 못한다. 기억나면 가서 산다..고는 하지만 또 나가기 귀찮아서 또 포기.     


* 기억력 나쁜 거 이용 3번. 직장에서 엄청 스트레스 받으면 꼭 해야 하는 거 몇 개만 적어놓고 전혀 관련 없는 글 한 개 쓰고 뭐 먹고 게임 한판 때리면 스트레스 증발. 나이 들어서 느낀 건데, 내가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몸은 스트레스 그대로 받는 거 같긴 하다. 수면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들더라.     


* 기억력 나빠서 좋은 거? 남편이랑 싸울 때 "너 전에도 이랬잖아!" 이런 식의 싸움이 불가능하다. 생각 안 남. 그리고 내가 좀 심하게 빡쳤다 싶으면 그 때 또 잠깐 멘탈 타임아웃하고 결정한다. 지금 화난 상태로 뭐라 할 것인가 아니면 망각의 의자에 스르륵 편하게 앉아 쉬었다가 나중에 결정할 것인가. 난 귀차니스트니까 보통 2번 선택. 그래서 아직까지 싸운 적이 없다 (...) 20분 지나고 나면 김이 다 빠져서 말이지. 할 말은 다 하는데 뭔가 드라마틱한 임팩트는 영.     


* 기억력 나빠서 안 좋은 거. 작년 이맘 때 어디 휴가 갔는지 생각이 안 나서 (...) 페이지 뒤졌다. 그냥 영국 있었군. "양파 휴가다. 도배가 시작된다" 선언하고 12월부터 1월까지 3주 동안 도배 열심히 했더군. 냐하하. 놀러갔던 건 사진을 봐도 새롭다. 이럴 거면 왜 돈 들여서 휴가 가는 거냐;;     


* 어렸을 때는 주의력 통제 불능으로 힘들고 분하고 내가 진짜 이거만 없었어도...!! 이런 한탄 많이 했는데 지금 보니까 뭐 그래도 다들 하나씩 사연 있기 마련인데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 그리고 말했듯이 내 정체성의 너무 큰 부분이 ADD라서 이게 아니라면 내 삶이 어땠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힘들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국 리버럴 죽지 않았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