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8일
남아공 시절에는 서류를 작성할 때 '인종'을 선택하는 칸이 많았다. 백인. 흑인. 인도계, 그리고 칼라드. 그럼 난 뭐지?? 가끔가다가 '중국인'도 있었는데 난 그것도 아니잖아??
나 같은 사람 소외감 느끼라고 그렇게 만든 건 아닐 테고, 그 인종그룹 넷이 전체인구의 98%+ 를 커버할 테니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인종 칸이 나올 때마다 난 멈칫했다.
미국 비자가 나왔고 이제 인터뷰 하고 여권에 도장만 찍으면 된다. 내가 주 신청자인데 서류 작성하다 문득 든 생각. 내 앞에 나서서 싸워준 페미니즘 전사들 덕분에 편하게 일하고 산다라고 말은 하지만, 잊어버릴 때도 많다. 주 신청자가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든 서류는 별생각 없이 '부인' 칸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난 서류 작성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인 이름", "부인 생년월일", "처가 부모님 이름", "부인 결혼 전 성" 이런 거 쭉 나올 텐데.
여자가 일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런 여자가 취업 비자 받아서 이주하는 것도 흔하니까 서류 디자인할 때부터 '부인' 대신 '배우자'를 넣었을 것이다. 주류면, 그러니까 최고 평범한 옵션으로 살아가면 딱히 내가 이득 본다는 느낌은 없지만 어쨌든 편하다. 난 30대 후반에 전통적인 결혼을 한 애엄마니까 편한 게 많다. 웬만한 공적 서류에는 '기혼자'란이 있다. 우린 제일 간단한 결혼 옵션을 택했다. 아이들도 우리 둘의 아이고 이전 배우자도 없다. 첫 결혼이다. 혹시 느끼셨는지 모르겠는데, 주류에서 벗어나면 하여튼 더 설명해야 하는 게 많아진다. 악의가 없어도 그렇다. 보험 들 때도 아이들이 내가 낳은 아이인 상황과 입양아인 케이스는 기재해야 하는 정보량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냥 평범하게 살면 덜 번거롭고 편하다.
고졸 때는 '전공이 뭐세요?' 하면 설명이 길어졌다. 아 대학교 때 이거 공부했었는데 중퇴했어요. 묻는 사람도 딱히 궁금해하진 않았을 텐데, 남들 졸업할 때 같이 졸업했음 간단하게 '인문계열이요' 정도면 끝났을 것을.
이전 세대에서는 당연히 남편이 가장이고 나는 부양가족에 머물렀을 터인데, 앞 세대에서 난리굿을 쳤더니 취업 비자 신청자가 여자일 수도 있다는 거 고려한다. 이혼했을 수도 있다는 거 고려한다. '보통의 이성 결혼'에게만 배우자 비자가 주어지다가, 이제는 동성 결혼 파트너도 된다. 사회가 바뀌고 프로 불편러들이 주류가 되면서, 배려가 생기고 절차가 바뀌고 신청 서류가 바뀐다.
남아공의 서류도 이젠 좀 바뀌려나. '기타' 라도 넣어달라구. 나 진짜 심각하게 백인/흑인/인도계/칼라드 중에 꼭 고르라면 무슨 그룹인지 되게 오래 고민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