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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r 23. 2018

양파 신년사

2018년 1월 2일

연말에 계속 조용했죠. 사실은 다 접고 페북 퇴갤 계획 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저 그만할래요' 글 올리면 저 우는 소리 + 옆구리 찔러 칭찬받기 잔치가 될 게 뻔해서 그냥 조용히 있었어요.     

Everyone has their 15 minutes of fame. 다들 반짝 화제가 될 때가 있다고 하죠. 저 역시 지난 2년 동안 그거 이용해서 페미니즘 공론화하는데 써먹었습니다. 한국에서 잘 먹힌다는 스펙. 결혼해서 애 둘 낳고, 그러니까 '할 것 다 하고 사는 여자'의 방패로 시선을 끌 수 있었고, 그걸로 제 글이 좀 더 널리 읽힐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화제성 콘텐츠는 지루해집니다. 온라인에는 온갖 스토리가 넘쳐나고 저 역시 그 수많은 콘텐츠 중에 하나. 밥도 똑같은 거 두 끼 이상 못 먹는 이들 많은데, 스토리 역시 마찬가지겠죠. 매일같이 좀 더 재미있고 와 닿는 콘텐츠가 나오는 세상에서 똑같은 얘기 계속하는 사람이 재미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소비되었습니다. 뭐 어차피 그런 식으로 반짝 화제성이라도 그 와중에 페미니즘 공론화가 조금이라도 되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만.     


페북 계정 비활 해둘까 하고 들어왔는데 미처 닫지 못한 메시지 창에서 한 분이 이전 글[1]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스물일곱에 어떤 심정이었는지 썼던 글입니다. 아프리카의 고졸 무직 유부녀. 직장 다니다가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다시 대입 도전해 보겠다고 설쳤던 해였죠. 그해 마지막 12월. 대입은 실패했고 책은 쭉 냈지만 당연히 사장되었고, 아프리카 대학교 문과 졸업장은 여전히 멀었고, 일은 쉰 지 일 년째였어요. 그런데 오늘 갑자기 보인 트위터의 오래전 욕. 저보고 '십금수저 아줌마 한국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꼰대질'이라고 욕했더군요. 우와 나 출세했다. 스물일곱 그때에서 십 년 지나서 무려 씹금수저 소리까지 듣네! 이 정도면 인생 성공.     

자주 말했던 얘기지만. 그때 그 막막했던 스물일곱의 양파가 씹금수저 꼰대 소리 듣기까지의 십년 동안 저는. 우선 재취업을 했고 수트케이스 두 개 들고 영국까지 이민도 왔고, 외노자로 십 년 살았고, 애 둘 있는 워킹맘 하면서 공부도 했어요. 그 과정 중에 페미니즘이 없었다면, 페미니즘으로 바뀌어진 세상이 없었다면. 저 사실 그렇게 의지 대단하고 독한 여자 아니거든요. 못 했을 거에요. 당장 한국 시나리오로 봐도 그렇잖아요. 스물일곱의, 한때는 공부 좀 했다 하더라도 현재는 고졸 무직 유부녀가 어떤 상황일지 잘 아시잖아요. 그런 제가 다시 취업할 수 있었고, 이민 갈 수 있었고, 외노자로 취업 가능했고, 일하면서 임신 출산 공부 육아 가능했고, 그러면서 씹금수저로 업글도 가능했습니다(들을수록 입에 착착 감기네 아싸). 

    

혹시 실비아 플래스의 시 Mushroom 아시나요.     


Overnight, very

Whitely, discreetly,

Very quietly     


밤새. 아주 하얗게. 비밀스럽게. 아주 조용하게. 일 년 전과 달라진 거 보이시나요. 정려원 씨가 수상소감으로 성폭력을 말하고, 여기저기서 성범죄 피해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속에서도 점점 반응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드라마에서. 기사에서. 노래 가사에서. 하루 자고 일어나면 조금씩 변해 있습니다. 페미니즘 책이 팔리고, 화제가 되고, 반향도 만만치 않지만 싸우는 이들도 늘어납니다. 그 싸움에서 자신은 상관없다 하던 이들도 조금씩, 조용히 바뀌어 갑니다.     


Diet on water,

On crumbs of shadow,

Bland-mannered, asking     

Little or nothing.

So many of us!

So many of us!     


메갈, 워마드 욕하는 동안 여성 모두가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많이 바라지도 않았지만 김치녀 맘충 소리 들어야 했던 이들. 아직은 짓밟히고 무시당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성희롱 발언이 문제가 됩니다. 한샘 사건이 그알 에피소드로 만들어졌습니다. 여혐 관련 글에 페미니스트들의 댓글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이 달립니다. So many of us. 조금씩 변해간 이들이 무리를 이루고 분위기를 바꿉니다.     


Nudgers and shovers

In spite of ourselves.

Our kind multiplies:     


우리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이런저런 패턴으로 연대하고. 그들은 하나 하나는 무시할 수 있었을지라도 점점 많아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렇게 사회적 현상으로 변해갑니다. Nudgers and shovers.     

그리고 2018년은. 그 다음 해는. 2020년은.     


We shall by morning

Inherit the earth.

Our foot's in the door.     


문은 열렸고, 우리 이제 발 하나 집어넣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기쁘게 소비되어서 퇴비가 되었습니다 (...)     


Happy new year everyone!     




[1] 27세의 양파는 - 내 안에 슈퍼맨은 없어

https://www.facebook.com/londonyangpa/posts/1949773458641465

https://brunch.co.kr/@yangpayangpa/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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