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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r 23. 2018

이 정도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할만한 가장 아닌가요?

2018년 2월 20일

한국 남성이 미국 워킹 비자를 받아서 전 가족을 데리고 나왔다고 하자. 부인은 몇 달 기다려야 노동 비자가 나온다. 그동안은 전업주부다.     


이 남자가 출근 전에 따뜻한 밥을 바라거나 퇴근 후에 저녁을 바라는 거, 아주 자연스러울 거다. 특히나 애들이 아주 어리지 않고, 낮에 학교에 가서 시간이 빈다면. 이 남자가 빨래를 좀 돕고, 퇴근하고 나서 애들과 좀 놀아주고 한다면 아주 좋은 아빠 소리 들을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하느라 힘들다고 늦게까지 일하거나 주말에는 피곤해서 잠만 잔다 해도 잔소리하는 사람 별로 없겠지. 그리고 부인에게 자신의 부모님, 그러니까 시가 식구들을 좀 챙기길 바라는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닐 테다. 어머니 생신이시면 전화라도 해드리고 뭐 등등.     


뭐 알아챘겠지만 지금 현재 우리 집 상태다. 난 현재 꽤 괜찮은 직장에서 꽤 잘 버는 외벌이 직장인이다. 남편의 비자가 나오기 전까지 최소 4개월 동안은 그렇다. 하지만 나는 아침에 남편이 밥 차려주기를 바라지 않고, 남편이 아이들을 위해 만든 저녁이 있으면 좀 먹거나 아니면 그냥 내 밥 내가 챙겨 먹는다. 남편이 내 밥까지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주방 바닥 매일 닦고 화장실 청소 빨래 여전히 한다. 쉬는 날이면 애들 밥도 번갈아 가면서 한다. 그럼에도 나는 세뇌 받은 게 있다 보니 늘 남편에게 고마워한다. 아이들 픽업을 다 알아서 해줘서, 학교 숙제나 준비물을 다 챙겨줘서, 저녁마다 애들 밥을 잘 챙겨 먹여서, 집을 잘 치워둬서, 요리하고 나서 부엌 정리를 다 해서. 난 고마워한다. 난 좋은 남편 만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반대의 입장이라면 난 아주 당연하게 다 했을 텐데도, '남자인데 이렇게 잘 해', '여자라면 당연히 해야지'가 없어지지 않는다. 남편은 단 한 번도 생색을 낸 적이 없는데도 그렇다. 그리고 저녁에 퇴근하면 내가 아이를 보고 정리할 테니 운동하려면 가라 등을 떠밀기도 한다. 여자라면 하루 종일 애들 뒤치다꺼리하더라도 저녁에 '혼자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느낌이 없는데, 내가 남편이 답답할까 배려해주는 것은 내가 배려있는 사람이라서....는 아닐 것 같고 (난 평소에도 상당히 둔한 편이라) 쉴 새 없이 들어온 조언에 세뇌 되어서일 것이다. 남자는 동굴이 필요하고, 남자는 이럴 때 답답해하고, 남자는 자기의 시간이 있어야 하고, 남자는 남자는 남자는. 그리고 여자의 일은 '본능'으로 치부되어버린다.     


애는 이쁘다. 하지만 이쁜 애들은 코 파다가 코피 나서 이불에 다 흘리기도 하고 열심히 요리한 걸 안 먹는다고 뻗대기도 한다. 아니, 뭐 말 잘 듣는 아이라도 삼시 세끼 먹여야 하고 목욕시키고 옷 갈아입히고 놀아주고 치워야 한다. 아이는 이쁘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째로 이불 빨래 싹 다 하는 것까지 사랑하지는 않는다. 아이가 너무나 이쁘고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해도 주방 치우는 것까지 눈물 나는 기쁨으로 바뀌진 않는다. 싫어도 한다는 거, 아이의 부모로서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이상하게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힘도 세고 허리도 덜 아픈 (...)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것은 '어머나 힘들고 답답하지 않을까' 걱정이 덜컥 된다. 꼴펨이라는 나, 요리 청소 빨래 육아랑 지금도 그리 친하지 않은 나마저 그렇다.     


포인트: 

우리 인정합시다. 양파는 여자 기준으로는 살림 못 할지 몰라도 남자 기준으로 보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할만한 가장 아닌가요. 그렇다고 해줘. 나도 우쭈쭈 받고 싶어.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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