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라 Nov 17. 2019

넉넉하고 짠내 나는 인심

고든 램지식 스테이크

 결혼 후 처음 설거지를 할 때 남편은 어찌할지 몰라 함께 서 있었다. 미안한데 뭘 같이 해야 할지 모르겠고 혼자 앉아있자니 부려먹는 것 같아 맘에 걸렸다고 했다. 그렇게 잔뜻 미안한 표정으로 싱크대 옆에 그냥 서 있던 모습이 마냥 귀엽고 고마웠다.
 지금은 내가 부엌에서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 방에서 모른 척 누워있다가 마무리가 되어갈 즈음 괜히 말을 건다. "OO 씨~뭐해?" "아이고, 내가 하려고 했는 데에~~~" "음~부엌에서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이런 아는데 왠지 얄미운 생각에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슬금슬금 나와서 갑자기 눈치를 보는 척을 하곤 한다. 
전에 글에도 쓴 적이 있었지만 남편도 요리를 하거나 설거지 등 주방에서 하는 일들을 하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다. 손도 느리고 도통 해본 적 없는 일을 해서 그런가 설거지 한 번 시작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고 뭔가를 만들면 저세상 요리가 되어있다. 그래도 계속하려고는 하는데 성격 급한 나는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수습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아 그냥 하지 말라고 말리게 되었다.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실패한 이후 요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던 남편은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래도 고기 굽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며 고든 램지의 스테이크 굽는 비법 영상을 계속 보며 다시 요섹남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는 듯했다. 마트 고기 코너에서 스테이크를 굽는 방법을 설명하는 남편을 말리면 서운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이 잘하는 다른 일들이 있으이 각자 소질에 맞게 분담하는 게 더 나을 테니 굳이 드라마 남자 주인공처럼 요리까지 잘할 필요는 없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부엌 금지령에 가로막혀 꿈을 펼칠 수 없었던 남편에게 기회가 왔다. 마트 소고기 세일이 시작된 것이다. 시식코너에서 고기 굽는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진 내가 스테이크를 구워달라고 남편에게 부탁을 해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 모두 본인에게 맡기라며 또 방 안에 들여보내고 문을 닫아버린다. 또 한참을 기다리다 일어나 보니 집 안에 연기가 자욱하다. 뭔가 불안해서 부엌으로 뛰쳐나가다 바닥에 미끄러져버렸다. 바닥에는 미끄러운 기름기가 가득했다. 고기를 구우며 환기를 전혀 안 했나 보다.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남편을 보니 언젠가 본 듯한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왠지 측은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그냥 맛만 있으면 되지 않냐고 괜찮다고 대인배처럼 굴어 보았다. 
"근데.. 너무 짠 거 같아서... 어떡하지?" 
짜면 얼마나 짜겠냐고 웃으며 맛을 봤는데, 이건 파스타보다 더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까운 소고기를 버릴 순 없어서 말없이 침묵의 식사를 하던 중,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처음에 고기를 굽기 전에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하고 올리브유를 발라두었고, 팬을 달군 후 기름을 두르고 고기를 올려 센 불로 육즙을 가두는 시어링도 완벽하게 했다고 했다. 마늘과 양파, 파프리카, 허브(로즈메리 등)를 올려 같이 굽다가 버터도 녹여 고기에 끼얹으며 좀 더 익혀줬단다. 그냥 들으면 거의 완벽한데, 왜 이렇게 짜게 된 걸까. 실수로 소금을 쏟기라고 한 걸까. 남편도 의아해하더니 자기가 찾아본 레시피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봐. 여기 소금을 넉넉히 뿌려주라고 되어있잖아." 
아, '넉넉히' 바로 이 부분이 문제였다. 소금을 뿌리고 나니 뭔가 넉넉하지 않은 것 같아 계속 조금씩 거 뿌린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고기 두 덩어리 중 한 덩어리를 먼저 해보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후 나머지 하나는 좀 덜 짜게 되었다. 처음 것이 너무 짠 덕에 덜 짜게 느껴지는 거 같긴 했지만 이 정도면 처음 한 것 치고 잘했다 하며 나름대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거의 일주일 동안 빠지지 않는 냄새와 기름기 때문에 끊임없이 환기와 바닥 청소를 하며 그 여운을 느껴야 했다. 
 남편은 그 이후로도 종종 스테이크를 구워주었다. 그래도 계속하다 보니 점점 맛도 좋아지긴 했다. 이제는 재료도 혼자 잘 찾고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게 은근히 플레이팅까지 신경 써서 차려준다. 
 그리고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생각만 해도 여러모로 짠내 나는 첫 스테이크다. 아찔하고 강렬한 맛은 고든 램지도 결코 흉내 낼 수 없을 거다. 

이전 08화 고향 덕에 누리는 호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