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라 Nov 17. 2019

로맨틱한 생일 파티

굴 들깨 미역국

남편과는 15년 전에 처음 만났다. 여러 번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지만 서로 친구로 잘 지내왔기 때문에 연인 사이가 아닐 때도 서로 생일은 챙겨 왔다. 어릴 때는 생일이나 기념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해서 평소와 다른 이벤트를 기대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처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준비한 선물을 받지 못하면 상대방이 나한테 관심이 없나 서운해하기도 했다. 마음의 크기를 증명하고 측정하지 않으면 불안했기 때문일까. 누구는 생일에 뭘 했고 어디를 가서 맛있는 걸 먹고 얼마나 좋은(비싼) 선물을 받았더라 하는 이야기들로 나와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낀 적도 더러 있었다.
 힘든 시기에 함께 차려 먹는 밥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많은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것도,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 심리에서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흥미가 떨어졌다. 그런 것들은 그저 처음에만 잠시 감탄하고 신기해할 뿐, 비용과 비례할 만큼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생일선물도 실용적인 것으로 고른다. 평소에 가지고 싶었건 것을 생각해 두었다가 쿠폰처럼 생일 날짜와 상관없이 사용한다. 본의 아니게 결혼기념일, 생일이 모두 연말연초로 몰려있고 그즈음 크리스마스와 설 명절 등 연휴까지 겹쳐서 겨울 아이템들만 사게 되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생일 선물을 미리 당겨 쓰는(?) 우리만의 룰이 생겼다. 
 너무 감성에 메말랐나 싶긴 하지만 그 날에 얽매여서 가지고 싶지 않은 선물을 안겨주는 건 어차피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꼭 하나 해주는 건 있다. 그날 꼭 상대방이 미역국을 끓여주는 것. 이거 하나만큼은 빼먹지 않고 하려고 한다. 케이크는 없어도 손수 미역국을 끓여 함께 밥을 먹는 게 우리만의 생일 문화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린 꽤 밥에 집착하는 편인 것 같다. 
 결혼 후 처음 맞는 남편 생일에는 굴 들깨 미역국으로  끓여주었다. 어릴 때 엄마가 가끔 특별식처럼 끓여주셨는데, 해산물 싫어하던 언니도 감탄하며 한 그릇 가득 먹었던 기억이 나서 남편에게도 맛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먼저 마른미역을 물에 불린다. 껍질을 깐 굴은 무즙 또는 소금물에 넣어 살살 흔들어 씻어준다. 이후 깨끗한 물을 넣고 여러 번 헹궈서 준비한다. 냄비에 물기를 빼고 알맞은 크기로 자른 미역과 다진 마늘, 간장, 들기름, 맛술을 더한 후 볶다가 물을 부어 팔팔 끓인다. 굴과 들깨가루를 넣은 후 굴이 탱글탱글하게 익을 정도로만 끓여준 후 소금과 국간장으로 간을 맞춰 마무리한다. 떡국떡 또는 찹쌀 새알을 넣으면 밥 없이 국만 먹어도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된다. 
 해산물이 들어간 미역국을 처음 먹어 본 남편은 들깨가루가 들어가 뽀얗고 살짝 걸쭉한 느낌이 낯설었는지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 보였다. 몇 숟가락 먹어보더니 고소한 들깨가루와 탱글한 굴의 조화가 나쁘지 않은 지 맛있게 잘 먹어주었다. 사실 생일인 남편보다 내가 더 맛있게 먹었다. 엄마가 끓여주던 맛을 잊지 않고 내가 만들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일날 따뜻하게 끓인 미역국을 나눠먹으며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엄마 대신 내게 미역국을 끓여주는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서 없던 애정도 마구마구 샘솟는다. 그래서 우리 기준에서는 이것이 멋진 레스토랑에서 비싼 음식 먹는 것보다 더 맛있고 로맨틱한 생일 축하 방식이 된 것 같다. 

이전 09화 넉넉하고 짠내 나는 인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