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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J Aug 12. 2021

6-2. 무지개 산 비니쿤카, 마주하다

[쿠스코]


무지개 산 비니쿤카, 오르는 중


중간 쉼터에 도착해 다같이 쉬고 있는데, 불쑥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과연 지금 아니면 어디서 고산병을 경험할 수 있을까? 힘들다고 생각해서 힘든 게 아닐까? 여기서 제대로만 이겨 내면, 앞으로 남은 일정은 고산병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심호흡을 하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답답한 느낌이 온 몸에 퍼지더니 금방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고산병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에는 고산병이 옭아매는 족쇄가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두번째 쉼터로 향하는 길은 오히려 등산로 초입에서 중간 쉼터를 향해 오를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만 이렇게 생각했는지 다른 친구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 순간을 영상으로 남겨 두면, 이 날을 추억하며 되돌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나서 앞으로 달려가 친구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다. 해맑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들은 고산병과의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건데, 친구들은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내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단다. 내가 생각해도 맞을 만 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먹구름은 온 데 간 데 없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더니 시야가 탁 트였다. 이윽고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듯 보였지만, 몇 분을 걸어도 제자리 걸음을 걷는 것만 같았다. 정상 부분 산등성이를 따라 사람들이 일렬로 오르는 모습은 마치 숭고한 목적을 갖고 순례길을 묵묵히 걷는 순례자들을 떠오르게 했다.



보이는가, 정상을 향한 행렬
나 혼자 신났다



정상까지 200m 남은 지점에서 마지막 휴식시간을 가졌다. B의 표정은 고통에 절여진 듯 일그러졌고, S는 어지럼증을 호소하더니 급기야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교적 체력이 좋은 K도 씩씩하게 버티는 듯 했으나 상당히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나만 혼자 싱글벙글이었다. 앞으로 남은 길은 급격한 기울기를 자랑하는 오르막 구간이었고, 이전보다 더욱 신경써서 올라야 했다. 가이드 알렉스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바모스, 아미고(가자, 친구들)”를 연신 외치며 기운을 북돋아주며 우리를 이끌어주었다. 마지막까지 힘을 다해 한걸음씩 옮겼다. 다 왔다.. 드디어.. 정상이다!


바모스
아미고



무지개 산 비니쿤카, 마주하다


이곳은 해발 고도 5,036m 무지개산 비니쿤카(Montana WINIKUNKA) 정상이다. 정상 꼭대기에 올라가니 영롱한 무지갯빛 자태가 눈앞에 펼쳐졌다. 왜 비니쿤카를 무지개산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1시간 40분 동안 고군분투하며 산에 오른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곱디 고운 비단옷을 둘러 입은 듯 색이 선명하고, 표면은 부드러워 보였다. 비록 하늘에 먹구름이 낀 탓에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무지개산을 볼 순 없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 높은 산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올라왔다는 자부심과 짜릿함, 비니쿤카의 풍경에 취해 그 순간을 즐겼다. 내면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는 기쁨이 웃음과 감탄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 이 벅찬 감동!





산을 오른다는 건 멋진 일이다. 등산도 그렇고, 무슨 일이든 끝까지 가봐야 하는 법이다. 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천지차이다. 풍경뿐만 아니라 내면에 차오르는 감정의 격이 다르다. 이 맛에 등산하나보다! 비니쿤카 정상은 경사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조심히 이동해야 했다. 마침내 최정상에 도착했다. 무지개 문양을 배경 삼아 여러 자세를 취하며 사진도 찍고, 비니쿤카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단체사진도 남겼다.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불던지 B가 입고 있던 노란 우비가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능선을 따라 날아가 버렸다. 멀어져 가는 우비를 바라보는 B의 얼굴에는 허탈함과 아쉬움이 가득 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원래 산은 만년설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얼음이 녹으면서 그 속에 매장되어 있던 광물들이 표면에 드러났고, 태양과 만나 각기 다른 빛을 발산하게 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어 무지개 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 모습이 세상에 알려진 건 불과 7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환경파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인 셈이다. 이 사실을 듣고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무지개산은 아름다웠고, 나는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무지개 산이라는 이명을 얻었고,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된 것이다. 축복일까, 불행일까? 


정상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상 또한 경사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무지개산과 주변 일대를 감상했다.


저곳으로 올라야 무지개 산을 볼 수 있다. 정상 위에 정상 있어요


비니쿤카 이후


정상에서 비니쿤카를 충분히 감상하고 이제 내려갈 시간이었다. 본래 하산이 등산보다 더 위험하고 만만치 않은 법이다. 정상에 서 있을 때 날이 잔뜩 흐려지더니 우박이 머리 위로 떨어졌고 제법 많은 양이 내리기 시작했다. 좀처럼 우리를 쉽게 보내 주질 않았다. 정말 요란한 날씨였다. 등산으로 쌓인 피로가 하산할 때 몰려와 피로감은 극심했고,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최대한 신경을 쓰고 다리에 힘을 주면서 걸어야 했다. 버스에 타자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곧바로 머리가 지끈거렸고 어지럼증까지 느껴졌다. 그동안 억제했던 고통이 한꺼번에 몰아서 올라오는 듯 했다. 정상에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기진맥진했다. 확실히 고된 일정이었다. S는 버스에서 극심한 어지럼증과 멀미를 호소했고, 결국 점심도 먹지 못하고 잠을 자야 했다.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뷔페식으로 나왔지만 볶음밥은 짰고, 치킨은 퍽퍽했다. 너무 맛도 없고 기운이 없어서 그냥 푹 자고 싶었지만,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아서 이번에도 입 안으로 음식을 집어 넣었다.


숙소로 돌아와 S는 곧바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고, K와 B는 저녁식사를 사러 나갔다. 그 사이 나는 신발 네 켤레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와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본의 아니게 대청소를 했다. 저녁은 근처 피자가게에서 사온 따끈한 피자와 맥주를 먹었다. 늘 그랬듯 여행의 마무리는 맥주가 옳다. 오늘처럼 고된 일정이었다면 더더욱 맥주를 마셔야 하는 법이다. 피자가 어찌나 맛있던지, 정말 꿀맛이었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S는 K가 차려준 죽을 몇 숟갈 뜨지 못하고 도로 침대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 하루 한가득 쌓인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남미 여행 중 가장 강행군에 속한 일정을 해결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태양과 가까운 비니쿤카의 햇볕은 너무나도 강력했던 걸까? 숙소로 돌아와 거울을 봤는데, 얼굴이 유난히 붉었다. 비니쿤카를 오를 때 비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감기 기운이 올라왔겠거니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은 더 붉어졌고, 각질이 벗겨지더니 따갑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고산지대 태양에 약한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어쩐지 정상에 가까울수록 햇살이 너무 강하긴 했다.. 선크림을 더 두껍게 발랐어야 했다. 남미의 태양이 이렇게나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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