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행운과 불행은 늘 함께 오는 법
배도 든든하게 채우고 정신도 차렸으니 이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했다. 잉카레일 티켓을 발권하러 기차역을 방문했다. 여권을 제시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안내 창구 직원으로부터 우리 이름으로 예약된 티켓이 없다는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음? 뭐라고? 지금까지 기차표 예매도 안하고 뭐한거지?’ 불안한 마음에 파비아노에게 전화를 걸었다. K가 핸드폰 너머로 그와 몇 마디 주고 받더니 잉카레일 직원에게 핸드폰을 넘겨 주었다. 직원은 통화를 마치고 컴퓨터를 몇 번 두드리더니 핸드폰을 돌려주었고, 파비아노는 아직 표를 구하는 중이기 때문에 조금만 기다리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반신반의했지만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이다.’ ‘싼 것에는 이유가 있다.’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는 말이 갑자기 와 닿았다. 몇 푼 아끼자고 호기롭게 작은 여행사를 찾아갔던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허나 기차역에 앉아서 불평불만을 늘어 놓는다고 해서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니고. 일단 표를 구하고 있다고 하니 믿어보기로 하고 일단 자리를 옮겨 근처 기념품 가게를 들렀다. 마추픽추 모형, 조각품, 그림을 시작으로 가방, 모자, 판초, 지갑, 팔찌 등 다양했다. 어떤 곳은 잉카버전 체스판, 잉카 문양이 그려진 트럼프 카드, 잉카 피규어, 마추픽추 조각상도 판매하고 있었다. 쿠스코 시내 기념품 샵에서 파는 것보다 종류도 무척 다양하고,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아 재미있었지만, 구경만 하고 지나갔다.
일정이 조금 꼬인 탓에 시간이 많이 남아 기차역 근처 카페에 들어가 주스를 마시며 더 쉬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오전에 마추픽추에 다녀올 때만 하더라도 날이 무척 맑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려서 놀랐다. 날씨가 좋았을 때 마추픽추를 다녀왔던 우리가 정말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를 나누며 내리는 비를 감상했다. 마치 하늘이 복잡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시커먼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더니 금방 그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음료 한 잔씩 더 주문하고 카페에서 와이파이를 실컷 쓰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스마트폰을 하며 휴식 시간을 즐겼다. 어느새 빗줄기가 잦아들더니 결국 그치고 날이 개었다. 다시 비가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숙소로 이동했다.
호텔로 돌아가 우리 사정을 설명하니 로비에 앉아 있다가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호텔 로비에서 기다린지 2시간이 넘어갈 무렵 기차표를 예약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표를 확인했는데, 출발 시각은 오후 8시였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 30분 남짓. 그렇다. 우리는 기차역에서도 2시간 30분 동안 기다려야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변덕스러운 하늘은 다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 처하면 서로 욕하고 얼굴 붉힐 법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인 말을 주고 받으며 힘을 냈다. 대신 분노의 화살은 파비아노를 향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듯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오늘 안에 쿠스코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기차역에서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비가 내리는지 참, 알 수 없는 마추픽추의 날씨다.
오랜 기다림의 연속에 지쳐갈 무렵 역사 안으로 기차가 들어왔고, 막차에 몸을 실었다. 아구아스깔리엔떼에서 오얀따이땀보로 향하는 기차는 만석이었고, 좌석은 좁고 불편했다. 목적지에 내리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탁한 가로등 불빛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동안 비가 오랫동안 내렸는지 곳곳에 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가이드로 보이는 사내가 우리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고, 우리는 그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이제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쿠스코로 돌아가나 했더니 얄궂게도 우리를 기다리는 건 작은 승합차였다. 차문을 열자 내부에는 이미 일고여덟 명의 관광객들이 다닥다닥 붙은 채 가방을 품에 안고 있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서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짐을 보관할 수 있는 트렁크가 없어서 몸집만 한 배낭을 안고 가야 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강행군으로 온종일 바쁘게 돌아다닌 탓에 차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좁은 차 안에서 몸을 뒤척이며 간신히 쪽잠을 청하는데, 무거운 배낭에 허벅지가 짓눌려 슬슬 저리기 시작했고, 덩달아 불쾌지수가 급속도로 올라갔다. 이 순간만큼은 비니쿤카를 오를 때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고통에 비례해서 파비아노에 대한 원망과 분노도 커져만 갔다. 행운의 여신은 우리에게 성스러운 계곡 투어와 마추픽추를 성공적으로 둘러 볼 수 있도록 아주 맑은 날씨를 허락해줬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고난과 불행도 함께 던져주었다. 불행을 겪으니 행복했던 순간이 더 빛나보이더라.. 1시간 30분 가량 이어진 고통스러운 순간을 버텨내자 쿠스코 도착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드디어 해방이다...!
스트레칭을 하며 긴장한 몸을 충분히 풀어준 다음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매우 늦은 시각인데다가 연락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호스트는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고, 넓고 쾌적한 숙소를 둘러보니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눈 녹듯 풀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하루의 끝은 다행히 웃으며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