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
다시 돌아온 쿠스코에서 여유를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우리가 며칠 동안 머무르게 될 숙소는 맨 처음 쿠스코에 와서 묵었던 숙소에서 불과 다섯 걸음 떨어진 옆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쿠스코로 돌아왔을 때는 낯선 곳에 온 설렘보다 익숙한 곳에서 느낄 법한 편안함과 반가움의 감정이 더욱 컸다. 게다가 주변 지리가 눈에 익숙해져서 돌아다니는 데 불편하지도 않았다.
모처럼 여유를 만끽했다. 지난날 강행군으로 쌓인 피로를 풀 겸 오늘은 특별한 계획 없이 푹 쉬기로 했다. 네 명 모두 느지막히 잠에서 깨어났지만 좀처럼 침대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이불 속에서 한참동안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가 지루해질 때 즈음 배가 고팠다. S가 숙소 근처 산블라스 시장에서 사온 샌드위치와 과일주스를 다같이 나눠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간단하게 허기를 달래기에 딱 좋았다. 시장에 다녀온 S가 과일주스에 대해 극찬을 하기 시작했다. 직접 눈 앞에서 생과일을 손질한 다음 믹서기에 과일과 설탕을 한가득 넣고 잘 갈아서 주스를 내어 줬는데, 상당히 많은 양을 담아주길래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렇게 입이 마르도록 극찬을 하니 궁금증이 생겼다. 내일 꼭 방문하리라 다짐하고 식사를 마쳤다.
옷을 챙겨 입고 환전하러 아르마스 광장으로 내려갔다. 평일 점심시간인지라 도심 한복판은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도 북적였다.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지인들 속에서 머나먼 타지에서 날아온 외지인의 눈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이곳이나 한국이나 사는 모습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 사는 거 비슷비슷하네
오리온 마트 구경하기
환전을 마치고, 오리온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리온 마트는 이마트나 홈플러스와 비슷한 대형마트였고, 며칠 동안 일용할 양식과 생필품을 충당하기 위해 천천히 둘러보며 장을 봤다. 마트 안으로 들어가는데,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렸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여러 상품과 브랜드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육류코너에 도착하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큼직한 돼지 뒷다리가 시선을 사로 잡았다. 돼지부터 시작해서 소, 양을 부위별로 손질해 담은 고기팩과 소시지, 베이컨, 햄 등 육가공품도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지고, 속이 든든했다. 바로 옆에는 톰과제리에서 봤던 치즈부터 동그란 치즈, 체다 치즈, 고르곤졸라, 통모짜렐라 등 각종 치즈가 전시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쓸어 담아 매일매일 고기와 치즈를 배불리 먹고 와인으로 시원하게 목을 축이는 신선놀음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 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배낭여행자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채소코너로 이동했다. 감자의 나라라고 불러도 손색 없을 만큼 각양각색의 감자가 진열되어 있었다. 콩알만한 감자도 있었고, 심지어 성인 남성 주먹보다 큰 감자도 많았다. 감자 구경하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감자를 유심히 보던 와중에 K가 제안을 했다. “오늘 저녁에 감자전 먹을까?” 며칠 동안 페루 음식을 충분히 먹기도 했고, 슬슬 한국 음식이 그리워질 때가 되었기에 나머지 세 명 모두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저녁 메뉴를 확정 짓고, 감자전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녀석들을 세심히 골랐다. 고기와 채소, 과일, 맥주 등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았다. 와인은 한국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이걸 보고 그냥 지나치면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두 병을 엄선해서 담았다. 두 손 가득 무겁게 장을 보고 돌아와 돼지고기구이와 채소볶음을 점심으로 해먹고, 그리고 와인을 곁들여 마셨다. 대낮부터 술을 마셔도 괜찮은 오늘이다!
쿠스코 저녁 산책
점심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감자 손질 작업에 들어갔다. 고산지대에서 자라난 감자는 땅의 기운을 고스란히 흡수한 듯 단단하고 옹골찼다. 하지만 껍질을 잘 벗겨지지 않아서 껍질 까는 데 굉장히 애를 먹었다. 몇 시간에 걸쳐 껍질을 깐 다음 얼추 마무리를 하고, K와 나는 저녁 산책을 하러 나갔다.
시내를 둘러보다가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성당 앞 한 노파가 우리를 가로막더니 대뜸 돈을 내라고 손짓했다. 입장료를 받는 것으로 생각해 2솔을 지불하자 우리에게 예수 사진이 든 조그마한 뱃지를 주더니 성당으로 들여 보내줬다. 성당은 규모가 작은 편이었고, 고통받는 예수상이 걸려 있었다. 성당을 둘러보다가 입구 쪽으로 시선이 이동했는데, 사람들이 돈을 내지 않고 그냥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당했다! 이 노파는 만만해 보이는 관광객을 상대로 강매 행위를 벌이고 있던 것이다. 순진한 우리는 그냥 눈 뜨고 코 베인 셈이었다. 이미 돈을 지불했고 다시 돌려받기가 영 찜찜해서 그냥 착한 일 했다 생각하고 성당을 나왔다.
쿠스코는 하루에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듯 일교차가 큰 편인데, 저녁이 되자 한낮의 열기는 사라졌고 저녁 바람에는 서늘한 기운이 가득 했다.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하니 하늘에는 검푸른 색이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광장의 가로등은 오렌지빛을 내뿜었고, 광장 타일 바닥이 가로등 불빛을 사방으로 비추어 광장 일대가 은은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검푸른 저녁 하늘과 오렌지빛 조명이 만들어 내는 색감의 조화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광장의 야경을 한참 감상했다. 야경을 보러 산책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골목을 따라 올라갔더니 불빛이 들어오는 작은 폭포 조형물이 있는 작은 광장에 도착했다. 아르마스에 비해 작은데다 분위기도 으슥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앉아서 대화를 나누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팔찌, 목걸이 등 장신구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만들어 내는 생기가 주변을 채웠다. 하지만, 감자를 갈아야 했기 때문에 흥을 즐길 시간도 없이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이어지는 골목을 따라 걸었는데, 중심가에서 멀어진 골목길은 인적도 드물고, 불빛도 어두침침해서 치안은 영 좋지 않았다. 나름 건강하고 튼튼한 성인 남성 2명도 으슥한 분위기에서는 불안함을 느껴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날이 저물고 나면 혼자서 골목길을 다니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안전하게 큰 길로 다닙시다.
감자전 대작전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열심히 감자를 갈았다. 강판이 있어 쉽게 갈 수 있었지만, 큼지막한 감자를 갈아 댔더니 어깨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맛있는 저녁식사를 먹겠다는 일념 하에 서로 북돋우며 감자를 마저 갈았다. 갈아 놓은 감자에서 전분기가 빠지기를 기다리며 잠시 핸드폰을 하며 숨을 돌렸다. 달궈진 그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감자전 반죽을 올리니 지글거리는 소리가 아주 감미롭게 들렸다. 노릇노릇 잘 익은 감자전이 유난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자고로 전은 부치자 마자 그 자리에서 먹어야 하는 법. 감자전을 한 입 크기로 찢은 다음 입 안에 넣으니 고소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오늘 저녁은 감자전과 짜파게티. 여기에 술이 빠질 수 없지! 각자 쿠스퀘냐 한 병씩 손에 들고 시원하게 마셨다. 하루 종일 땀 흘려 가며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맛보는 한국식 감자전이라.. 우리가 또 해냈다. 고산병을 이겨내고 비니쿤카도 다녀온 우리다. 역시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