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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May 05. 2021

자고로 여자라면 총 하나는 가져야지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어린 시절은 묘하게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내 기질의 면면을 종합해보면 공통적으로 일찌감치 성 역할 고정관념을 반대하는 행보를 걸어나갔다.


나는 분홍색보다 파란색을 좋아했다. 엄마와 손을 잡고 아동복 가게에 가면 사장님이 추천해주는 옷은 죄다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분홍색을 가장 싫어했고 대신 파란색, 하늘색, 초록색에 눈길이 갔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나의 반응에 사장님들은 당황하기 일쑤였고 우리 엄마는 "아... 글쎄 우리 애가 특이하게(?) 그런 걸 안 좋아하더라고요..."라며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곤 했다.


나는 바비인형보다 비비탄 총을 좋아했다. 언젠가 출처 모를 조그마한 장난감 총이 집에 있었고 나는 한동안 열심히 가지고 놀았다. 그 장난감 총이 망가진 날, 나는 새 총을 사달라고 울며 불며 떼를 썼다. 평소 부모님에게 뭘 사달라고 우겨본 적이 없었던 내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억이다.


보다 못한 아빠는 나를 문구점으로 데려갔다. 내가 고른 건 갈색과 은색이 섞인 아담한 비비탄 총을 골랐다. 만 원 남짓의 총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그후로 나는 집에서 열심히 총을 쏘아댔다. 빳빳한 종이 하나를 표적으로 삼아 세워놓고 맞추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얼마 전, 둘째 조카가 아파트 장터에서 장난감 총을 실컷 구경하며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섯 살 여자 아이가 벌써부터 총을 좋아한다니. 나는 "그럼! 자고로 여자라면 총 하나는 가져야지"라고 말해주었다. 짜식, 뭘 쫌 아는구나?


'남자 아이니까 파란 옷, 여자 아이니까 바비인형' 하지 않고 나만의 취향이 확실했던 나의 어린 시절. 지금의 나도 그때와 같을까. 그때와 달리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거, 남들이 해야 한다는 것에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취향이 확고한, 나만의 개성이 있는 삶을 꾸려가자고, 어린이였던 나에게 배운다.


2021년 어린이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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