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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Sep 21. 2024

선생님! 얘 이것 좀 보세요!

소녀는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찾았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윈도우 비스타가 깔린 컴퓨터로 나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던 소녀였다. 지금은 균형이 깨졌지만, 당시에는 포털 사이트계의 양대산맥이었던 네이버와 다음을 오가며 궁금한 정보는 곧장 검색해서 알아내고, 실시간 검색어를 새로고침하며 연예 기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오싹했던 강풀 만화는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서도 매일같이 출석체크를 했던 곳은 네이버 스포츠.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나는 인터넷 시작 페이지로 설정해 둔 네이버에 접속할 때마다 스포츠 탭에 들어가 농구 기사를 확인했다. 어제 있었던 경기에 대해서 어떤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는지, 오늘은 어떤 경기가 예정되어 있는지 같은 것들을 봤다.


꼼꼼한 성격 탓인지 우리팀(당시 안양KT&G) 경기 일정은 미리 알아야 마음이 놓였다. 일정 탭을 누르면 국내 프로농구 경기 일정을 볼 수 있었는데 우리팀만 따로 필터링해서 한글2004인지 2006인지로 옮기고 프린터로 인쇄했다. 나름 컴퓨터 학원에 다니면서 배운 스킬을 야금야금 써먹는 것이었다.(노래 가사도 종종 인쇄했다. 한창 유행하는 2000년대, 2010년대 노래 가사를 한눈에 보이도록 페이지 2단 구성으로 출력한 후 매일같이 따라불렀다. 단, 엄마 아빠가 집에 오기 전까지만…)


경기일정이 적힌 종이는 학생으로서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필통 안에 고이 보관했다. 심심하면 슥 꺼내고 펼쳐보고 접어두는 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시간에 한 친구가 내 필통을 뒤적거리더니 선생님께 외쳤다.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얘 필통 안에 이런 거 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농구를 비롯한 스포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반 친구들이 많이 알지 못했다. 사실 나조차도 몰랐으니까 당연하다. 친구는 그런 내가 신기한 모양인지 종이의 존재를 아주 우렁차게 온 교실에 알렸다. 농구를 얼마나 좋아하면 이렇게 일정표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나, 모두의 의아함 속에 교실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수업시간에 주목받는 상황 자체로도 부끄럽지만 필통이라는 나만의 공간 안에 숨겨둔 비밀이 세상 만천하에 공개되어버렸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황급히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수업과 너무나 동떨어진 일이었지만 마음이 넓으셨던 선생님은 다행히 큰 제재 없이 넘어가셨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이 이 작디작은 일화가 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왜 그토록 부끄러웠을까, 왜 아직까지 기억에 남을까, 마냥 신기하게 여기다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농구를 많이 좋아했구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들킬 때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처럼, 정말 좋아하는 무언가를 주변에 알린다는 것은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좋아한다는 기준은 매우 주관적이고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경우가 잦아서인지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망설인다. 싸이월드 감성 낭낭했던 시절의 중학생 소녀는 농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짝사랑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왈가닥인 친구의 깜빡이 없는 행동은 짝사랑을 강제 고백한 셈이다.


그때는 내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든 친구가 미웠지만 지금은 고맙게 생각한다. 좋아하지도, 나와 크게 상관있지도 않은 일이었다면 짝사랑 고백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일과 그 일 이후 오래도록 남은 잔상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친구가 아니었더라도 나 스스로 농구에 대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과 마음을 고백하는 일은 또 다르다.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날을 지금까지 미뤄왔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친구가 대리 고백(?)을 해준 덕분에 나는 고백에 대한 두려움을 꽤 많이 내려놓았다. 이미 너무 강렬하게 부끄러운 첫 경험을 해버렸으니,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덜 어렵지 않은가. 그 이후로 나는 더 적극적으로 농구를 좋아하고 농구를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인연을 맺게 됐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나도 하나쯤은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 유별나고 대단하게 좋아하지 않더라도 내가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것이고 이건 타인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 아니다.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니까. 지금 현재에 충실한 채 나는 농구를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열렬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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