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결혼을 늦게 한 후배들이 고민상담을 할 때 조언으로 자주 하던 말이다. 남편과 모든 걸 함께하기를 기대하면 서로 힘들어질 수 있으니,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은 친구를 만나서 해소하는 게 서로를 위해 좋다는 의도로 이야기한 것이다. 이 조언을 들은 후배는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 언니의 말이 이해가 된다며 고맙다고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상대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려주고 나의 생각, 나의 감정, 취향, 욕구 등을 공유했음에도 성향이 달라 같이 하지 못하는 부분을 친구와 함께한다면 맞는 조언이겠지만, 남편과 서로 맞춰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내가 하고 싶은 건 마음 맞는 친구와 해버리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것을 함께 경험해 볼 기회조차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닐까.
각자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편할 수는 있지만 결혼 후에도 나 혼자 살 때와 변한 것이 없다면 그 부부가 건강한 관계라고 볼 수는 없을지 모른다.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상대가 원하는데도 자기 방식만을 고수하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그대로 두는 것은 어쩌면 방관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주의자 부부의 일상을 주제로 글을 쓰기로 하고는 한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첫 글을 쓸 때만 해도 나는 부부 각자의 영역을 중시하고 개별성을 인정하는 관계가 건강하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 이 글을 읽고 명확해졌다.
둘이 만나 그냥 둘로 존재하는 관계는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자 하는 관계만큼이나 문제다. 다른 두 세계가 만나 교류하고 침투하여 서루 연결되고 풍부해지는 '우리'의 영역이 없으니 무늬만 관계일 뿐이다.(중략) 나와 너를 존중하되 '우리'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건강한 관계다. - 관계를 읽는 시간, 문요한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나'와 '너'의 영역과 '우리'의 영역이 공존했다면, 아이를 키우며 한동안은 '너'와 '나' 각자는 존재했지만 '우리'의 영역이 부족했던 것이다. 각자 새로 주어진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워서 '우리'의 영역을 가꾸지도 넓혀나가지도 못했던 것이다.
'내가 원하지만 남편이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을 친구랑 같이 하면 돼'라고 했던 생각을 육아에도 적용했다. 주말에 남편과 함께 외출하고 싶지만 남편이 쉬고 싶어 하고 내켜하지 않는 게 보이니 그냥 아이 친구 엄마랑 함께했다. 그 집은 남편이 주말에 일을 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남편이 집에 있는데도 (갈등이 싫어서) 아이와 둘이 나갔다. 아이 앞에서 화내고 큰소리 낼 수 없다는 명분을 앞세워 나의 욕구와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육아에 지쳐 힘이 들고 자유시간을 갖고 싶을 때면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감사하게도 친정부모님은 시골 전원주택에 사시고 아이를 편하게 봐주신다) 그 시간은 나도 쉬고 남편에게도 자유시간을 준다는 명분은 있었지만 아빠가 아이를 온전히 돌보며 육아하는 경험을 빼앗았다. 아이도 엄마나 외할머니와 함께하는 게 익숙해지다 보니 엄마가 혼자 외출하고 아빠와 둘이 남겨지는 것을 힘들어했다. 남편은 아이 핑계를 대며 나의 외출을 막을 수 있었고,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고 밖에 나가야 에너지가 채워지는 나는 점점 지쳐갔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남편에게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고 갈등을 회피하다 보니 차라리 아이와 둘이 있거나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했다.
서로의 감정이나 욕구는 배제한 채 필요에 의한 대화만을 나눴다. 남편은 소통을 시도했으나 내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힘들어했고 스트레스는 친구들을 만나서 알아서 풀고 오도록 했다. 나 역시도 시간이 나면 친구들을 만나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나는 남편에게 자유를 주는 쿨한 와이프이고 각자의 자유를 중시하는 멋진 부부라고 착각하며 지냈다. 그 시기 우리는 '우리'의 영역은 없이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