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하게 울려대는 전화벨소리에 머리를 헹구다 말고 수건으로 대충 감싼 채 안방으로 달려갔다. 기다리던 전화인 줄 알았더니 동네 친구였다.
"아.. 왜? 머리 감고 있고만."
투덜대는 소리에 아무 반응이 없다.
"..........."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 할거.."
"나 사기당했어!!"
내 말을 끊고 다 죽어가는목소리로 친구가 전화기너머로 말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설마?... 어떻게?"
"지금 좀 나와줄 수 있어?"
"어 그래. 머리만 말리고 나갈게."
갑자기 나도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다.
머리를 말리면서도 생각이 어지럽다.
이틀 전 저녁 무렵, 친구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었다. 정말 정말 미안한데 오백만 원만 빌려줄 수 있냐고했다.
"혹시 이사하는데 필요한 거야?"
친구는 그렇다고 했다.
이사하려고 부동산에 집도 내놓은 상황인걸 알고 있던 터라 조금 당황했지만 흔쾌히 빌려줬다. 친구는 고맙다며 한 달 뒤에 꼭 갚는다고 했었다.
설마 부동산 사기일까? 온갖 상상을 하며 약속장소에 나갔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친구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밥은 먹었어?"
"아니. 안 넘어가."
"안 넘어가도 먹어야 해. 차 후딱 마시고 밥 먹으러 가자. 밥이 거북하면 죽이라도!"
그러나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기함시켰다.
부동산 사기가 아니었다. 귀신에 홀린 듯 핸드폰으로 온 이상한 문자를 클릭했고 어떤 단톡방에 초대되어 컴퓨터 배팅 게임? 같은 일종의 도박 비슷한 걸 한 것이었다.
카드론으로 받은 800만 원을 날리고 오기가 생겨 친구로부터 500만 원을 빌려서 그것까지 홀랑 날렸을 때에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이미 눈에 뭔가 씌어서 뵈는 게 없었다고 했다. 급기야 동생한테서 300만 원, 나한테서 500만 원 빌려서 그것까지 싹 다 날리고 나서야 나 이제 어떡하나 싶더란다.
3일도 안돼 2100만 원을 날리고 친구는 내 앞에서 울지도 못한 채 넋 놓고 있다.
나 어떡해만 연발하며.
할 말이 없었다.
"정신나갔네 정신 나갔어! 애 기숙사 보내놓고 허전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엉뚱한데 정신 팔려서는...어떻게.. 그런 걸...?"
말문이 막혔다. 오래된 친구였으면 욕이나 한바탕 해줬을 텐데...
나와 그녀는 동네 엄마로친해진 지 2년이 채 안 됐다. 같은 아파트에서 십 년 넘게 얼굴을 봐왔지만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최근이었다.막말할 정도로 끈끈한 사이는 아니어도 이만한 관계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이제 어떡할 거야? 그거 경찰서에 신고는 못해?"
"어떻게 신고를 해..."
절망으로 가득찬 친구의 얼굴이 안쓰럽다기보다 화가 났다.
"어떻게... 그러냐?그날 전화받고나는저녁 내내 인터넷뱅킹으로 대출을 알아봤잖아. 적금을 깨려면 담날 은행에 가야 하고 넌 계약금이 급하다 그러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돈을 마련해서 네 맘 편하게 해 주려고 온 신경을 다 썼다고. 그 돈이 고스란히 도박판에 들어갈줄은 꿈에도 모르고.. 간도 크다 진짜. 넌..."
"내가 정신이 나갔지..."
얼굴이 잿빛이 되어 친구는멍하니 앉아있다.
괜히 뜨거운 차를 시켰나 보다. 벌컥벌컥 들이켰더니갑자기 열이 나면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내 돈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갚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 "
"어떻게 그래...."
"카드론은 쪼개서 내는 수밖에 없고 친구나 동생한테는 나한테 얘기했던 것처럼 다 털어놔. 그리고 처분을 기다려. 그 방법밖에 없어. 내가 봤을 땐.... 돈 나올 구멍은 네가 다 써버려서 없잖아 이제."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나 한 번만 더 빌려주면 안 돼? 친구한테 모레까지 500만 원 갚는다고 했는데 도저히 그 친구한테는 말을 못 하겠어. 이미 이 꼴 저 꼴 다 본 자기가 그냥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