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계절이 다가오니 심심치 않게 소풍도시락 사진들이 눈에 띈다. 그걸 보면서 지난가을 아찔했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이른 아침, 아이들 등교준비로 분주한데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앞동에 사는 친구다.
"어.. 왜?"
전화기를 귀와 어깨사이에 갖다 붙인 채 아이 물병에 물을 받았다.
"나 내려가서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응? 뭘 말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뭐긴 뭐야? 우리 소율이 도시락 싸주기로 했잖아?"
"모레잖아... 소풍이???...오늘이었어?"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진짜 오늘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 다시 한번 물었다.
"어. 일단 끊어봐. 나 소율이 친구 엄마한테 김밥 좀 얻을 수 있는지 전화 해보게."
친구 목소리가 다급하다.
멍하니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몇 주 전부터 친구는 아이 소풍도시락을 걱정했다. 코로나가 끝나고 드디어 첫 소풍을 가게 된 아이는 잔뜩 들떠 있는데 엄마는 도시락을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시락전문점에 주문하려 했더니 대량 구매를 해야 해서 어렵고, 그렇다고 직접 김밥 쌀 자신도 없고... 만날 때마다 하소연을 했다. 결국 듣다 못한 내가 그날 도시락을 싸주기로 했다. 대신 예쁜 도시락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었다. 친구는 고맙다며 나에게 뇌물? 까지 주었는데.....
그랬는데!
소풍날짜를 분명히 들었는데 왜 내 멋대로 금요일이라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텅 빈 채 오락가락 방안을 서성이었다. 시계를 보니 8시 5분! 소풍 갈 아이는 집에서 8시 30분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25분 동안 뭘 해야 할지 미친 듯이 생각했다.
집 근처 김밥 집은 일찍 문을 열지 않는다. 다른 김밥집을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 호출하는 시간이며 왔다갔다 하는 시간, 김밥 주문해서 바로 나온다 해도...... 도무지 답이 안나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옷을 주워 입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겼다.
"얘들아, 엄마 급한 일 생겨서 그러는데 니들끼리 알아서 학교가~~"
문을 박차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처음으로 15층에 사는 게 한스러웠다. "15.. 14.. 13.. 12..."빨간 숫자를 노려보며 속으로 빨리빨리를 외치는 순간 머릿속에 퍼뜩 편의점이 떠올랐다.
'그래! 편의점이 있었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내달렸다.
달리면서 친구에게 전화했다.
"김밥 구했어? "
"아니. 전화를 안 받아."
"그래? 나 지금 편의점 가고 있으니까 기다려봐."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아냐.. 관둬. 그냥 애 아프다고 선생님한테 얘기하고 소풍 안 보내려고."
친구의 체념하듯 하는 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무작정 뛰여 들어갔다. 정신 나간 여자처럼 헐레벌떡 김밥코너로 가보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채 텅텅 비어있었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과자며 샌드위치를 주워 담았다. 계산대로 뛰여가 계산을 마치고 나온 나는 또 미친 듯이 다른 편의점을 향했다. 달리기를 못해서 늘 학교에서 구박받던 내가 아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살리려는 듯 절박한 심정으로, 초인적인 힘으로 내달렸다.
두 번째 편의점으로 뛰여 들어가자마자 김밥코너부터 보았다. 다행이다. 김밥이 세줄 남아있었다. 누가 집어갈세라 그것들을 몽땅 손에 거머쥐었다. 옆에 마카롱이 보였다. 마카롱도 집어 들고 그 옆에 미니 통조림까지 보이는 대로 담았다. 물과 음료수까지 챙겨서 계산을 하고 나와 또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이제 집으로 가서 도시락통에 최대한 허접해 보이지 않게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
짧은 다리를 한탄하며 이 악물고 뛰었다. 핸드폰을 보니 8시 21분이었다.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집에 도착하니 25분~
부랴부랴 도시락통을 꺼내고 집에 있던 사과를 깎고 세팅을 시작했다.
아직 학교에 안 간 아이들과 출근 전인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체 무슨 일이냐며 물었지만 대답할 여유 같은 건 나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김밥 세줄포장지를 전부 뜯어냈다. 편의점 김밥이지만 세 가지 맛 골고루 맛보게 하고 싶었다.후들거리는 손으로 김밥 꽁다리 부분과 흐트러진 부분들을 빼고 깔끔하게 잘라진 부분들을 골라 도시락통에 조심조심 옮겨 담았다.
김밥세팅은 끝났다..
깎아놓은 사과와 편의점에서 사 온 복숭아 통 졸임을 담아내니 과일세팅도 끝났고..
남은 도시락통에는 뚱카롱 2개와 샌드위치를 작게 잘라 채워주었다.
이로써 도시락 세 칸이 다 채워졌다!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 찍어서 친구한테 전송하고
부랴부랴 도시락가방에 도시락을 채워 넣고 물과 음료수를 챙기면서 전화기 통화버튼을 눌렀다.
"얼른 내려와!!!"
친구 아이 소풍가방에 도시락을 넣어주며 말했다.
"소율아, 이모가 미안해. 내년에는 이모가 꼭 집김밥 싸줄게. 소풍 잘 다녀와!"
"감사합니다 이모, 전 이 도시락도 정말 맘에 들어요. 제가 소풍 다녀와서 이모한테 한턱 쏠게요."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엄마 손을 잡고 학교로 뛰어갔다.
8시 37분이었다!!!
30분 동안에 나는 1년 치 쓸 에너지를 다 쓴 기분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띵똥! 문자 한 통이 들어온다.
"고마워.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게 가능하다니... 역시 대단해!"
친구의 문자였다.
'그래.. 그걸 알면 내년부터는 옆구리 터진 김밥이라도 네가 직접 좀 쌀래 이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