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기억 속 한 장면엔 한여름의 푸르른 텃밭이 있다. 키 높은 오이넝쿨 속에 오동통 길쭉한 오이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검푸른 고추와 동글동글 빨강, 노랑 토마토... 상추, 대파, 가지가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다.
늘 내가 먹는 속도를 못 따라잡던 느리게만 익어가던 토마토... 침을 삼키며 빨갛게 무르익길 기다리던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눈만 뜨면 토마토 밭으로 달려가는 나에게 할머니는 종종 심부름을 시켰다.
"선아... 오이 한 개만!"
손이 잘 닿지 않는 넝쿨 속 오이가 유난히 탐스럽게 보여 손을 뻗다 보면 맨살의 팔뚝엔 어김없이 미세한 긁힘 자국들이 생기곤 했다.
오이를 배달하고 돌아서면 할머니의 주문은 또 이어졌다. 대파 하나, 고추 몇 개, 상추 조금...
식사준비하는 할머니를 나는 그렇게 집과 텃밭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거들었다.
저녁메뉴로 할머니는 곧잘 가지밥을 하셨다. 영롱한 자줏빛의 가지 몇 개를 따다가 한솥 가득 가지밥을 한 날이면 나는 평소보다 두 배의 양을 먹었다. 식어도 맛있는 쫀득한 식감의 가지밥에 양념간장을 얹어서 먹던 그 환상적인 맛을 못 잊어 오늘은 나도 할머니표 가지밥에 도전해 보았다.
할머니는 가지밥 할 때 꼭 찹쌀을 사용했다. 일반쌀과 섞기도 하고 찹쌀로만 할 때도 있었는데 찹쌀 비율이 높을수록 내 입에는 더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도 찹쌀을 훨씬 많이 넣기로 했다. 일반쌀을 조금이나마 섞은 건 어디까지나 식구들 입맛을 고려한 나의 배려다. 깨끗이 씻은 쌀은 평소보다 물을 조금 적게 잡은 상태로 압력밥솥에 잠시 대기시킨다.(가지가 수분이 많은 채소이기도 하고 찹쌀이 많이 들어간 관계로 물은 평소보다 적게 잡는 게 좋다.)
가지 두세 개를 어슷 썰어서 돼지고기 살코기 부분과 함께 넣고 볶는다. (고기는 안 들어가도 상관없음) 소금 조금 넣고 숨이 적당히 죽을 정도로만 볶아준다. 볶아진 가지를 조금 전에 씻어둔 쌀 위로 골고루 부어준다.
압력밥솥 뚜껑을 닫고 취사를 누른다.
정석대로라면 볶은 가지는 밥이 거의 되어갈 때쯤 넣어야 하는 게 맞지만 전기밥솥은 그게 불가능하니 첨부터 같이 넣을 수밖에 없다. 가지 형태가 조금 뭉그러지는 것 외엔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오히려 나는 이게 좋다.
밥이 되는 동안 양념간장을 만들어준다.
마늘과 대파를 썰어서 고춧가루와 함께 간장에 버무려낸다. 간장에 푹 잠기는 것보다는 자작한 상태가 짜지 않고 맛있어서 간장은 많이 넣지 않는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입맛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