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쉼터

by 얀느

내가 근무하는 중학교 도서관은 학생들이 이용하기에 접근성이 떨어진다. 도서관 문을 열기까지 아이들은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다. 정문에서 가장 먼 별관 4층이니 선생님들도 이동하기 힘들다고 도서관 수업을 꺼리는 편이다. "헉~헉~,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제발 도서관을 1층으로 옮겨주세요!" 도서관에 오는 모든 아이들이 가뿐 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사서인 내게 그럴 힘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학교 측에서도 도서관을 옮길 만한 공간이 없어 어쩔 수 없단다.


이곳은 내가 신규 사서로 발령받아 5년째 근무하는 학교다. 5년이 되면 다른 학교로 옮겨야 하니 나는 지금 이 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이용자는 많은 편이라 그간 일하며 신규사서로서 넘치는 열정과 에너지를 마음껏 발휘해 왔다. 하는 만큼 아이들이 좋아하니 일하는 맛이 났다. "선생님! 오느라 힘들어서 죽을 뻔했어요!" 하면서도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을 보면 누구라도 팔 걷어붙이고 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날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 유나가 들어왔다.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종종 친구와 와서 놀다가는 아이였다. 도서관에 조금만 있다가도 되냐고 묻길래 30분 정도 여유는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학원까지의 시간이 애매해서 왔나 싶었는데 유나는 서가로 가지 않고 내 옆 의자에 앉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선생님, 저 고민 있는데 좀 들어주세요." 말할 곳 없어 마음이 답답하니 그냥 얘기만 들어달라고 말이다.


유나에게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었다. 그중 가장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가족간의 불화라고 했다. 불안한 마음 감추고 티내지 않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안하고 답답해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했다. 담임선생님께 말하면 부모님께 연락할 것 같고, 친구들에 말하면 말이 나돌 것 같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했단다. 그렇게 봉인되었던 이야기들이 눈물, 콧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밝게 보이던 아이의 마음속이 그렇게 새까맣게 탄 것을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의 온도를 어떻게라도 낮추고 싶었던 아이가 오죽하면 나에게까지 찾아왔을까.


전국의 모든 학교에 위클래스가 있다. 학생들의 전문상담선생님이 계신 곳이다. 유나가 가고 나서 후회가 밀려왔다. 사서의 섣부른 위로보다는 상담 전문가의 손길이 더 절실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려 유나의 상태를 부모님께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를 조용히 불러 물어보았지만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후로도 한 번씩 찾아와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던 유나는 더 이상 아무도 없는 방과 후에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 의미는 마음의 답답함이 해소되었다는 의미였다.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이 있다. 책이 필요해서 오는 아이들도 있지만 반에서 어울리기 힘들어 오는 아이들도 있다. 쉬는 시간 10분을 도서관에서 보내려고 달려왔다가 종 치기 1분 전에 달려 나간다. 그들 중에 민혜가 있었다. 쉬는 시간은 물론 방과 후에도 도서관에 머물던 아이.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며 방과 후에도 도서관에 남아서 공부했다. 수학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에는 수학선생님께 여쭤보고 오겠다던, 조용하지만 참 단단한 아이였다. 그러던 아이가 3학년이 되어 바빠져 도서관에 자주 못 올 것 같다고 하더니 학급반장이 되었다고 했다. 쉬는 시간마다 오던 아이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다. 함께할 친구가 생겼다는 말이니까.


학년마다 책 읽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도서관이 제 집처럼 편하다는 아이들이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그 얼굴들이 나타났다. 혼자 오는 아이도 있고, 친구랑 함께 오는 아이들도 있다. 따로 오던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말을 트게 되고, 서로 책 추천을 해주며 친해졌다. 3학년이 되어서는 자기네들끼리 글쓰기 자율동아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작품을 나에게 보여주며 읽어봐 달라고 했다. 이 아이들의 성장을 보며 더없는 기쁨을 느꼈다. 따로따로 반짝이던 별들이 모여 은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학원, 밀린 숙제, 수행평가 준비, 공부하느라 밤늦게 잠들지 못하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에게 학교도서관은 영혼의 쉼터같은 곳이면 좋겠다. 여러 가지 고민으로 갈 곳 잃은 아이들이 조용히 쉬다 가는 공간이면 좋겠다. 마음껏 쉬다가 세상으로 나갈 힘이 생기면 언제든지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곳 말이다. 자주 오던 아이들이 도서관에 뜸하게 와도 나는 그것 또한 반갑다. 밖에서 누군가와, 또는 혼자서 무언가를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테니 말이다.


도서관은 나에게도 영혼의 쉼터가 되어 준다. 퇴근함과 동시에 집으로 출근하는 듯한 몇 년을 지나오면서 내 영혼이 휴식할 공간과 에너지를 선물해 주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고, 내가 어떤 프로그램을 기획하든 무조건 좋아해 주는 아이들, 내가 추천해 주는 책이 재밌다면서 엄지 척을 날려주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도서관은 앞으로도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영혼의 쉼터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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