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중년을 위한 조건

by 얀느

지난주 수요일, 이미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 만들어 둔 안내문 하나만 서가에 붙이고 퇴근하려고 의자 위에 올라섰다. 6단 서가 꼭대기에 붙여야 해서 까치발로는 수평을 맞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안내문을 붙이는데 의자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누운 채로 정신이 들었다. 아마 의자가 뒤로 넘어지면서 떨어졌나 보다. 팔,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왼쪽 허벅지가 매우 쓰라렸지만 뼈에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듯하게 아파 만져보았더니 뒤통수가 야구공만큼 부어 있었다. 응급실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되었다.


도움받을 사람이 없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바닥에 앉아있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떨리는 손으로 챗 GPT창을 열었다. "의자에 올라갔다가 뒤로 넘어져서 뒤통수에 큰 혹이 생겼어. 어느 병원에 가야 할까?" 몇 초 지나지 않아 묻지 않은 부분까지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뇌진탕이나 두개골 골절, 심하면 뇌출혈까지 있을 수 있단다. 가야 할 병원, 가기 전에 확인해야 할 증상, 응급조치까지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듯한 GPT의 답변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구토나 깨질듯한 두통은 없어 응급실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 중소형 종합병원이 있었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수납, 검사, 의사 면담까지 다닐 생각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터와 가까운 신경외과를 찾아서 머리 CT를 찍었다. 의사는 두개골 골절로 보인다고 했다. 여러 증상이 서서히 나타날 수 있으니 24시간 지켜보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큰 병원 응급실을 가야 한다고 했다. 두개골 골절이라는 진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안한 마음 부여잡고 다음날 종합병원에 가서 다시 CT를 찍었다. 골절은 아니고 뇌진탕이란다. 정말 다행이었다.


두 달 전에는 출근길을 뛰다가 넘어져 길가에 대자로 뻗었다. 옷이 찢어지고 손바닥과 무릎에 피가 고였다. 쓰러질 때의 충격으로 광대뼈에 금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볼이 쓰라리고 아팠다. 하지만 지극정성으로 얼음찜질을 한 덕에 멍은 생기지 않았다. 불과 두 달 사이에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넘어 얼굴과 두개골이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평소에 일어나지 않던 일이 연이어 생기니 이것이 어떤 사고의 징후인 것인가 싶었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라고 있다. 1:29:300법칙이라고도 하는데 평균적으로 한 건의 큰 사고가 나기 전에 29번의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300번의 잠재적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통계적 법칙이다. 산업재해뿐만 아니라 개인사고 등에도 널리 인용된다고 하니, 종종 어딘가에 부딪혀 멍드는 일이 잦은 나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아마 300번의 잠재적 징후들이 끝나고 그다음 단계인 29번의 작은 사고가 진행 중인 것일까.


생각해 보니 내 평생 병에 걸려 입원하거나 사고로 응급실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남편도 마찬가지란다. 우리 집 청소년기 두 아이도 그렇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 가족은 사고나, 질병 한번 없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내온 것이다. 여태껏 건강하다는 이유로 감사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가족 모두가 건강하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고 행운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깨우쳐주려는 운명의 메시지일까.


이런 사고들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몸 상태를 돌아보게 되었다. 마흔을 넘어서면서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때나 마시던 커피를 오후 2시 이전에만 마실 수 있게 되었고, 맥주를 두 캔 이상 마시면 다음 날 필연적인 두통이 왔다. 그렇게 좋아하던 맥주였는데 말이다. 앉아서 책 읽고, 글 쓰는 정적인 활동을 좋아해서 운동량이 매우 부족한 상태이기도 하다. 숙면에도 문제가 생겼다. 여태껏 스트레스받거나 피곤할 때마다 푹 자면 몸이 회복되었는데 얼마 전부터 푹 잘 수가 없다. 갱년기의 시작인 것일까.


운동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부담 없이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운동이 있을까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손목닥터 9988'어플을 알게 되었다. 내친김에 어플과 연동된 스마트 워치를 저렴하게 구입했다. 스마트 워치와 9988 어플, 삼성 헬스를 연동하여 내 몸상태를 체크할 수 있고, 내가 걷기와 운동에 쓰는 시간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모르고 지냈던 새로운 세계가 활짝 열린 것 같아 설레고 신났다. 우선 하루 만보 걷기를 목표로 하고, 평일에는 퇴근 후 동네 학교 운동장을 뛰기로 했다.


이번 일들이 큰 사고의 전조 징후던, 어떤 깨달음을 위한 계기였던 나에게 잠깐 일어났던 해프닝으로만 삼고 싶지 않다. 가족의 행복도 나의 건강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당장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더 이상 막연한 행운에 기대지 않고 계획적으로 나와 가족의 필연적인 행복을 만들어야겠다. 그동안 소홀했던 내 몸을 돌보고 단단히 지켜 주어야지. 행복한 중년을 위하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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