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고민은 아니에요
내가 한때 애청했던 《지대넓얕》이라는 팟캐스트가 있었다. 네 명의 패널이 각자의 전문 분야를 바탕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토론을 벌이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날 내가 좋아하는 패널인 김도인이 "우울한 일상을 일주일 만에 탈출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 준다고 했다. 돈 한 푼 들지 않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라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스맨 운동'이었다. 짐 캐리 주연의 영화 <예스맨>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일상을 NO만 외치던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서도 YES만 외쳐야 하는 상황을 재미있게 그려낸 영화다.
김도인은 우울했던 어느 시기에 이 운동을 직접 실천해 보았다고 했다. 새벽 5시에 친구가 불러내도 거절하지 않고 나갔단다. YES로 점철된 일주일을 보내니 피곤했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스펙터클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일상으로 예스맨을 실천하고 있었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일을 함께 해보자고 하면 긍정적인 답을 기본으로 두고 생각한다. 여건상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기존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YES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집 안에 머무는 것이 가장 행복한 나는 솔직히 밖에서 쓰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기 때문이다. '안된다고 할걸, 약속 있다고 할걸, 바쁘다고 할걸.' 그럼에도 이런 루틴은 반복되기만 할 뿐 나아지는 것은 없다.
어릴 적 여섯 자매 중 다섯째였던 나는 집에서 착한 아이 역할을 자처했다. 무언가에 특출한 아이를 좋아하는 아빠 눈에 들기 위해서 내 나름대로 정한 역할이었다. 큰언니는 믿음직한 맏딸이어서, 둘째 언니는 수학을 잘해서, 셋째 언니는 못하는 것 없이 다재다능해서, 넷째 언니는 언변이 좋아서, 막내는 깜찍한 외모와 재롱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출 난 구석이 없던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청소하고 정리하는 아이였다. 심부름을 시키면 싫은 기색 없이 다녀오는 아이였으니 누구에게나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렇게 어른이 되니 예스맨이 되어 있었다.
어느 가을날 지인이 단풍이 예쁘다고 보러 가자고 했다. 단풍이 예쁜 계절이었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가을철마다 물드는 단풍을 보러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 생각만 해도 귀찮았다. 내 생각이 그렇다면 거절해야 하지만 그 마음은 꺼내지도 못하고 날짜와 장소를 정했다. 역시나 약속 당일 아침에는 후회막심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내가 한심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런 선택들이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새로운 곳에 가보고, 색다른 경험을 하며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 그대로 살았다면 밋밋한 일상이 되었을 텐데, 예스맨이 된 덕분에 추억들이 풍성해졌다. 무채색이 될 뻔한 내 삶이 무지개색이 되었다고나 할까.
예스맨인 덕분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는 성격에도 고등학생 때 학생회장 선거에 나갔고, 프랑스 공항에서 비행기를 함께 놓쳤던 낯선 여자의 한국행 비행기 값을 대신 지불해주기도 했다. 마흔이 넘어서 빨간 머리로 염색한 적도 있다. 모두 거절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를 규정지은 관념에 나를 가두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을, 새로운 인연을,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이런 에피소드들이 기억에서 휘발되는 것이 아쉬워 글쓰기를 시작했다. 내 글쓰기도 예스맨의 산물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예스맨의 삶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자신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YES 때문에 위험했다거나 손해 봤던 경험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운이 좋았던 것도 있을 테고, 소심한 성격 덕에 감당하기 벅찬 일에 덤비지 않았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예스맨으로 살면서 터득한 나름의 판단 기준이 있다. 바로 '나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심리적 이익을 말하는 것이다. 내 가슴에 쌓일 추억, 성장, 보람, 가슴 뭉클해지는 감정 같은 것들 말이다.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다면 몸이 고달프더라도 'YES', 반대로 그들에게만 이득 될 것 같다면 'NO'인 것이다.
그렇게 예스맨으로 살아온 덕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거절하지 못해 시작했던 책모임도 10년이 되었고 글쓰기도 시작했다.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은 방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탐구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자가 발전하는 스스로의 동력이 부족하니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반응하여 YES의 힘을 빌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YES로 삶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