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쌍계사 금당가는 길
참고: 단풍 사진은 어느 해 11월 8일, 초록잎은 어느 해 6월 11일에 찍음.
쌍계사는 해동범패의 근본 도량이다. 어느 해인가, 지리산 둘레길을 걷던 중에 쌍계사에 들렀는데 마침 범패공연을 한단다. 웬 행운인가 하고 자리 펴고 앉았다. 스님의 범패 소리는 성가에 익숙한 귀에도 이질감이 없다. 월명사가 지은 향가 ‘도솔가’를 범패 시작으로 본다면, 쌍계사는 그 시초를 이어받은 절이 아닌가.
절에 가는 목적은 딱히 없다. 심기가 닿는 접점이 생기면 가고 싶은 맘이 불쑥 들어찬다. 가야지, 가야지 하고 맘먹으면 한두 주 내로 가야지 안 그러면 못 가서 애가 탄다.
쌍계사 하면 마애여래좌상이나 금당부터 떠올라야 하는데, 은행나무부터 떠오른다. 은행나무가 일주문 주변에 한 그루, 팔영루 마당에 한 그루, 금당 가는 계단 옆에 한 그루가 있다. 팔영루를 지나 금당으로 가는 가파른 계단 끝에 나오는 문이 돈오문이다. 이 돈오문을 들어서서 기와 얹은 담장 너머로 순금 빛 은행나무를 본 적 있는가. 노란색도 아니고, 순전한 순금빛 그대로였다. 황홀하다.
이 돈오문에서 금당에 이르는 계단이 108개. 파초가 팔팔하게 지키는 팔상전을 옆으로 하고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금당이 나온다. 금당은 법당에 불상이 아닌 탑을 모신 국내 유일한 전각. 이 전각 마당에 서서 가을 절 풍경을 내려다보았는가. 불전 못지않게 평화로움을 안기는 그림이 그곳에 있다. 그 풍경을 보러 왔는데 오호라. 금당 선원은 하안거 중이다. 음력 4월 보름부터 돈오문에 빗장이 걸렸다고. 돌아서는 허탈한 심기가 대웅전 앞 천년 마애여래좌상 미소 앞에서 스르르 풀린다.
지리산 삼사로 불리는 천년 고찰을 찾아갔다. 쌍계사 화엄사 천은사, 가도가도 물리지 않는 곳이 아닌가. 금당선원을 둔 쌍계사, 국보 각황전 천장을 받친 기둥이 웅장한 화엄사, 보리수 노거수에 지리산 노고단 가는 길이 이어지는 천은사 순례길이다. 천지의 신이 사람 감시를 중단하고 잠시 휴식한다는 윤달이 들면 불자들은 바쁘다. 예수재를 봉행하고, 삼사 순례에, 공덕이 가장 큰 보시라는 가사袈裟를 불사한다. 내게는 그런 불심은 언감생심 갖다붙일 말조차 못 되고, 고찰을 즐겨 찾는 팬심에 가깝겠다. 더구나 가톨릭인으로 순례는 핑계일 뿐이다.
파울로 코엘류가 <오 자히르>에서 언급한 ‘아코모다도르’처럼, 나아가길 포기하고 순응하게 되는 어떤 순간, 자포자기에 가까운 상태로 진퇴양난에 처했을 때, 갈만한 자신만의 장소를 두었는지.
눈도 소처럼 순해지는 풀내 진동하는 산야. 이런 산속에 옴팍하게 들어앉은 절이 아삼삼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그럴 때 길 나서는 거다. 어느 해, 쌍계사 화엄사 천은사 천년을 초록하고 여름 복판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