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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얀 Oct 22. 2023

타임머신을 타고




네가 참 싫다.


솔직한 말이었으나 언제고 몸이 굳는다.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스러지고 서로가 버텨내었다. 있기는 하되 없는 것도 같은 며느리, 우리 가문이 존재가 모호한 이 포지션에 특화되어 있나 보다. 재물은 한 푼도 남겨주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어이 손녀에게 물려주고 말았나 보지.

여기까지 10년이었다.


명절을 맞아 몇 년 만에 시댁. 이 대문 앞에 오기 위해 불면의 밤과 108 번뇌, 파괴적 행동을 반복하고 분을 삭여야 했다. 17층을 알리는 엘리베이터의 띵, 소리와 함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지난날의 재생이 멈다. 오래된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에도 오지 말아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는 그저 현실,이었다.


유순한 며느리였다.  참았고, 미련했다. 무던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야 했고 후에 이 세상에 무던한 사람 같은 것은 없노라고 정정해 주기도 했다. 잘못된 변신은 모두에게 불운한 일이었다. 안 맞는 캐릭터를 유지할 수 있는 훌륭한 지구력이 없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시댁에서 돌아가는 길, 어둠 속에 입술을 깨물고 우는 볼썽사납고 미운 여자가 있다. 아이들이 달려가버리면 울다가 가까워지면 안 그런 척 이를 악문다. 큰아이는 눈치를 채 버렸을지도. 내 아이들도 어린 나와 같이 속이 깜깜해지고 말았을까.

이 동네에서 많이 울었었다. 길바닥에서 우는  어쩌다 주특기가 됐나. 골방에 처박혀 울어버려라, 고개를 주억거리며 일그린 얼굴을 한 못난이 바보. 이제 다른 '나'라고, 상황은 변하지 않으니 덜 아픈 일이어야 한다고, 채근해 보아도 위로해 보아도.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간다면.

돌아 날은 무조건 결혼 전이야.  모든 관계가 시작되 전으로, ' Back to the past ' 버튼을 눌러버려, 제발.

 

누구도 상처 입거나 원망하지 .

남편이 될 뻔한 그의 결혼식에서 기립박수를 치고, 그 부모님들께도 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자. 돌아오는 길에는 정말 근사한 날이었, 하며 입술이 얼얼할 만큼 매운 주꾸미를 포장하고 막걸리에 넣어 마실 달달한 사이다를 지 않고 챙겨 오는 거지. 치는 인연이 되는 일, 그런 갓벽날들을 꿈꾸면 안 돼?




친정엄마가 아이들 용돈을 꺼내온다.

준비성이 없는 할머니는 손주들 보는 앞에서 돈가방을 꺼내 봉투에 주섬주섬, 그러다 돈을 퍽 놓쳐버린다. 5만 원짜리 지폐다발이 바닥에 꽃처럼 퍼진다.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 나는 웃음이 픽, 난다.


아빠 살아있었으면 저 돈 다 나 달라고 할 텐데.
분명 그냥 다 줄텐데 말이야.


엄마는 살포시 웃고는 그렇지, 한다. 돈다발은 야무지게 돈가방으로 돌아간다. 아빠는 다 줬을 거다. 물질적인 것, 노동으로 바꾸어 온 것을 끼는 사람은 아니었다. 용돈 받아 쓰고, 다 쓰면 또 달라면 그만이었다. 컷 써볼걸, 더 더 더.


돈뭉치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빠가 살아 있는 것처럼, 꼭 예전처럼 그냥 이유도 댈 필요 없이 가져보고 싶다. 마의 노후 준비되어 있지만 래도 엄마는 주지 않을 것 같다. 합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000원짜리 주고받듯 가볍게, 내가 당신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빠라면 그랬을 거라고.




드물게, 꿈에서 아빠를 다.

보이지 않고 목소리들리지 않지만  수 있다. 우리 부녀어떤 사이였 정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딱히 아빠를 안 그리워함이 분명한데도, 깨어면 미진한 감정개운치 못하다. 이유는 단 하나, 도대체 아빠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제대로 얼굴을 보고 하고픈 말이 있지도 않고 어쩌려는 것도 없다. 밝은 기운, 아무튼  비스무리한 곳에, 그 속에 아빠가 있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



잘 지는지, 오겡끼 데스까, 그런 애틋한 말일랑 말고

른 바다 저 멀리 둥둥... 보일 듯 말 듯 넘실넘실,

아빠가 튜브를 타고 우습게 떠다니는 상상을 할까?



핑크색 하마 튜브를 타고 파도를 타세요.
멀리서도 제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핑크하마 튜브는 우리 아이들이 아끼는 것으로 수년간 워터파크와 해수욕장을 종횡무진하다 지난여름 운명했다. 그러니 아빠의 짝으로 딱이. 

엄마는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힘들어서 편 없이 홀로 있어도 외로울 틈이 없다고 한다. 쓸쓸하다느니 그런 감상은 여유 있고 편한 사람들 이야기라.


나는 특별하다고, 그런 마음을 가졌었다. 그 마음도 아빠도 잃고 말았지만. 

내 아빠는 핑크 튜브를 타고 있.

그리고, 아빠가 없는 사람은 슬퍼지려고 해.




이렇게 심란한 일만 줄줄이 일어나는 걸 보신 적 있으세요? 인생에서 큰 난관들만이 인격을 요구하는 건 아니죠. 누구든 큰 재앙에 맞서고 비극에 당당할 수 있지만, 사소하고 짜증스러운 일상사를 웃음으로 넘기려면 정말 밝은 '기운'이 요구된다니까요. 제가 키우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종류의 인격이에요. 인생을 최대한 능수능란하게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하는 게임으로 생각할래요. 만일 패배한다 해도 어깨를 으쓱하고 씩 웃지요. 또 이긴다 해도 그렇게 하고요. 어쨌든 저는 유쾌한 사람이 될래요. 다시는 줄리아가 실크 스타킹을 신는다는 둥, 벽에서 지네가 떨어진다는 둥의 불평은 하지 않을게요, 아저씨.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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