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이후,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에서 적는 글
"Siz de deprem hissettiniz mi? (너희도 지진 느꼈어?)"
교환학생으로 튀르키예를 오기 전, 한 학기 간 어학당 왓츠앱 톡방에서 종종 오갔던 메시지들이다. 사실 튀르키예는 지진대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 중 하나다. 이스탄불을 여행할 때는 갑자기 심각해진 폭풍우(튀르키예는 여름을 제외하면 언제나 날씨가 말썽이었다.) 때문에 모스크 앞으로 날아가버리는 내 목도리와 패딩을 잡느라 늘 정신이 없었다. 패딩은 눈과 비에 절여져 정신을 차려보니 가죽잠바가 되어있을 정도로 날이 갑작스레 좋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동부 지역의 대지진이 발생했던 첫 날, 숱한 연락과 문자를 받아도 심각성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교환학생을 시작한 지 나흘만이었다.) 아버지가 상시로 틀어두던 방송 뉴스가 흘러나올 TV가 내겐 없었고 이스탄불에선 심각한 폭풍우를 견디느라, 그리고 앙카라로 돌아와선 살림살이를 장만하느라 정신없이 지나갔으니까.
서서히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은 함께 오랜 기간 수업을 들었던 우크라이나 여성 알리나의 사연이 왓츠앱 톡방에 올라올 무렵부터였다. 튀르키예인 남편과 결혼해 튀르키예 정착을 위해 공부하던 분이셨는데, 남편이 하타이(Hatay) 지방 사람이라 시부모님의 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 집은 무너졌고, 차는 찾을 수 없고, 할머니는 건물 잔해로 인해 다리를 다치셔서 걸을 수 없고. 급하게 하타이 지방에서 차를 찾고 앙카라 시내에서 잠시 거주할 예정이라 수업을 듣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단톡방에 전했다. 선생님은 튀르키예에 사는 모든 어학당 수강생들에게, 유의해서 들으라며 다시 찾아올 지진을 대비해 리스트와 함께 작은 가방을 준비해 두라는 말을 전했다.
폭풍을 뚫으며 이스티클랄 거리를 거닐던 와중 TRT HABER(터키 신문사)로부터 에르도안 대통령이 일주일 간 국가 애도 기간을 가지겠다고 선포한 속보가 떴다. 탁심 광장의 커다란 전광판에도 빨리 회복되길 바란다는 애도 문구가 가득했다. (위 사진 역시 지하철역에서 찍었다.) 학교에서는 당국에 머무는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기자들을 연결해 주었고, 학과장님껜 통역을 위해 해당 지역으로 파견이 가능한지를 묻는 연락이 쇄도했다고 한다.
이어진 여진으로 미세한 떨림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사실 대지진이 일어났던 동부 지역은 시리아 국경 지대와 가깝기도 했고, 이슬람 문화권의 색채가 훨씬 짙은 구역으로 국내 외교부는 위험 지역으로 분리해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기가 쉽지 않다는 소리다. 아드야만, 가지안테프. 시사터어키어수업에서 동부 지역의 자연재해와 유적지에 관한 기사들을 조사하고 읽으면서 접했던 지역들이라 너무나도 친숙했다. 시험대비용으로 외웠던 재난 용어들을 실제 상황으로 접하게 되니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기도 했다.
이스탄불 여행을 마치고 내가 머무를 중부 앙카라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음 판의 이동은 이스탄불 지역과 겹칠 가능성이 있어 앙카라가 비교적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 지내던 한인들의 말로는 앙카라가 지진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다행히’라는 단어를 쓰기조차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한국에서 내게 안부를 물은 한 친구는 누군가의 다행이 누군가에겐 불행으로 다가갈 것 같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맞는 말이었다.
(몇 주간 현지 신문 1면부터 마지막까지 자식을 잃은 이야기와 수십시간 만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을 담은 이야기들로 빼곡했다.)
시리아 접경 지대인 하타이에서 온 친구 에브랄은 2차 대지진까지 겪고 앙카라로 넘어왔다. 3월 초에 언어 교환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국어문학과 친구 에브랄은 현재 나의 가장 친한 튀르키예인 친구가 됐다. 매주 한 번은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꼭 나오는 이야기는 하타이 지진. 사람들은 대지진이 2번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3번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지진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줬다. 그리고 정확히 세 번의 만남에 걸쳐 에브랄이 말한 대지진을 들을 수 있었다. 며칠간 차에서 생활해야만 했던 나날들과 13일 만에 발견되어 현재는 안전하게 앙카라에 머물고 있는 에브랄의 고양이 미노쉬의 이야기까지. (내가 머물고 있는 기숙사는 지진으로 인해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돼 현지 친구들을 고향으로 보내고 피난민들을 들여왔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진으로 떠나보내고 겪은 숱한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 덤덤히 말하길래, 오히려 나와 이스탄불 인근 지역 출신의 잔수가 그 상황을 더욱 속상해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까지 얼마나 힘든 시기를 보냈을까 헤아리며 말이다.
어제는 OT를 들으러 앙카라 대학교 캠퍼스에 갔다. 일주일만 지냈는데도 귀가 훨씬 많이 트여서 택시 기사님들과도 회화도 가능해졌다. (약간 언어실습 나온 기분이고,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배움이라고 느껴지긴 하지만... 그마저도 재미있긴 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캠퍼스 내로 들어왔는데, 기사님께서 모닥불 앞에 있는 학생들을 가리키면서 아마 지진 때문에 모여있는 것 같다고 했다. 택시에 내려 오티 가기 전에 아메리카노를 사다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남녀불문 모든 앙카라대학교 학생들이 발 벗고 나서서 구호물품을 나르고 있더라. 거대한 트럭에 끝없이 물을 실은 박스들이 보이고, 중앙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구호물품을 싸고 있고... 내가 아는 앙카라대학교의 한 친구는 정부가 제공하는 학사에 살고 있었는데, 짐을 다 빼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재민들을 위한 임시 수용 시설이 필요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한 순간에 집을 잃은 사람들이 70만 명에 육박한다.
터키에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친절했다. 체류한 지 9일, 첫날부터 터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모두 사람 덕분. 날 처음 보자마자 한국인이냐며 환영한다고 해준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고, 번호를 개통하지 않았을 때엔 직원 할인을 해주신 덕에 백화점에서 절반 가격에 화장품을 사기도 했다. 워커를 사러 갔을 땐 직원분들이 케이팝을 사랑한다며 함께 블랙핑크 춤을 추기도 했고, 모스크 안에 들어가 보겠다고 열심히 목도리로 머리를 감싸고 있을 땐 저 멀리서 아주머니들의 함박미소를 살 수 있었다. 한식당에 갔더니 세상에서 가장 신난 표정으로 한국말을 외치시는 아르바이트생의 배웅을 받기도 했고, 백종원 아저씨가 소개한 카이막집 아저씨의 메모장은 한국말로 빼곡했다. (몇 마디 더 알려드리고 왔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 기숙사로 40kg가 넘는 모든 짐을 옮길 때, 지나가던 아저씨들은 도움이 필요하냐며 짐을 번쩍번쩍 들어다 주셨다. (악수는 덤!) 더 이상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환대를 받았다. 앞으로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들어볼 수 있을지.
이렇듯 나와 내 주변인의 일상이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더욱이.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상황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봐야 한다는 점이다. 다정이 가득한 이 곳의 모든 사람들이 안정을 되찾고, 더 이상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지 않도록 말이다. 대가 없이 숱한 친절과 환대를 베푸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있다. 작은 보탬들이 쌓여 태산으로 피해를 막을 수 있길. Geçmiş Olsun Türkiy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