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한강
찰나의 만남.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조우.
현재는 과거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재와 과거는 공존한다.
여기,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가 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을 가진 한 여자가 있다.
어머니를 여읜, 이혼한, 그래서 아이를 잃은 여자가 있다.
바늘처럼 삶을 찌르는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진 여자가 있다.
어느 순간 언어를 잃은, ‘언어 없이 이해하고 언어 없이 움직이는’ 여자가 있다.
여기,
희랍어를 가르치는 한 남자가 있다.
안경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남자가 있다.
눈이 아름다운, 청력을 잃은 한 여자를 간절히 열망했던 남자가 있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랑을 잃은, ‘어리석은’ 남자가 있다.
#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것일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여기,
여자와 남자가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여자와 남자가 있다.
낯선 조우.
어둠 속, 안경을 잃은 남자의 외침을 듣고 여자가 다가온다.
남자의 손에 난 상처가 깊다.
눈을 잃은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는 소통할 수 있을까.
‘먼저 병원으로 가요’
밝은 곳으로 남자를 이끈 후,
‘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검지 손가락 끝으로 그의 손바닥에 또박또박 쓴다.’
낯선 대화.
남자를 부축해 여자는 남자의 방에 앉아 있다.
남자는 말하고, 여자는 침묵으로 대답한다.
# 시간이 더 흐르면......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꿈에서 뿐이겠지요.
그 때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세계가 잠기는 거겠지요
#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길 수 있다는 건.
#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_______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듣고 있나요? 들리나요?
잠이 깬 그가 조용히 나간 여자를 생각한다, 아니 꿈을 꾼다.
# 가늘게 떨며 망설이는 손. 손톱이 지나치게 바투 깎여, 그의 살을 조금도 아프게 하지 않던 손가락.
서서히 드러나는 음절. 침이 없는 압정 같은 마침표. 서서히 밝아지는 한마디 말.
# 그렇게 무서운 당신의 침묵이 생각나는 밤이 있었는데......
얼음 밑에서 두드리다 굳어버린 손 같은 침묵. 피투성이 몸 위로 쌓인 눈더미 같은 침묵.
어느 순간 그게 진짜 죽음으로 변해 버릴까봐 두려웠는데. 정말 딱딱해져 버릴까봐, 정말 싸늘해져 버릴까봐 불안했는데.
첫 버스를 타고 아이를 만난, 아이를 잃은 여자는 다시 남자에게 온다.
남자의 왼손에 여자의 손가락이 얹힌다.
여자를 모른 채,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안는다.
눈을 뜨지 않은 채 입을 맞춘다.
스치듯 지나는 순간.
그 좁은 틈에 마주 선 남자와 여자.
빛 없이 묻고, 침묵으로 답하는,
격렬하지 않아 쓰라린, 인연 아닌 인연.
#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