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가시지 않아요...

높고 푸른 사다리 by 공지영

by ean

잊었으나 한편 잊히지 않는 기억들, 아름다웠으나 가슴 시린 이야기가 있다.

지우려 했으나 여전히 마음 안에 남아, 보이지 않는 곳에 날카로운 생채기를 그어대는 사람이 있다.

과거이면서, 여전히 현재인 사람, 그리고 추억들.



#가끔 생은 우리를 배반하는데 그건 바로 가슴이 나설 때의 일이다.


저녁 어스름 속으로 기차가 도착하고, 소희가 왔다.

우리에게. 아니, 내게.

정요한.

그 때, 나는 신부 서품을 앞둔 베네딕도 수도회의 젊은 수사였다.

소희와의 만남 후, 나는 소희의 ‘하얀 얼굴이 내 갈비뼈를 열고 가슴 속으로 쑤욱 밀려’드는 통증으로 사랑을 절감했다.


# 까르르 웃던 그녀의 웃음 소리를 나도 모르게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던 것 같다. ____지독하게 감미로워서 지독하게 쓰게 느껴지는 고통을, 그러면 안된다고 아주 조그만 소리로 거부하면서, 기꺼이 느꼈다.


약혼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탄 소희를 나는 수도원의 다섯 번째 담벼락을 더듬으며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왔다.


나는 기도한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그녀를 사랑합니다.’라고.

그리고 기도 끝에 전해오는 하느님의 목소리,

‘사랑하라, 요한. 사랑하라.’

그리고 소희의 목소리,

‘우리 꼭 붙들고 가자.’


수도원을 나가겠다고 결심하던 밤, 나는 마음을 나누고 지냈던 수도원 입회 동기, 안젤로와 미카엘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접한다. 전소되어 검은 덩어리로 변해버린 이들의 참혹한 모습 앞에 나는 휘청거린다.


#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저 믿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 이상하다. 이 지상을 떠난 사람의 자취는 그가 남긴 사물에서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된다. 죽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어지러운 마음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채, 나는 ‘하느님은 한 번도 내게 준 적이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가진 소희와 여행을 떠난다. 기실 떠났지만 떠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나는 토마스 신부님을 뵌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따뜻한 분.

어린 시절 청춘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된, 그리고 독일에서 한국까지 와 지난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함께 산, 함께 시련을 겪은, 이제는 노쇠한, 토마스 신부님.


# 그가 쏟아낸 말들은 정말로 금빛 모래 언덕에서 흘러내린 고운 모래처럼 내 앞에 쌓였고 그리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____이제 악은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소리 없는 풀 모기처럼 우리를 각개격파하러 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혼돈이고 무의미라 해도 나, 내 생명, 내 곁의 것들을 부정하지 말자. 버리지 말자. 사랑만 있다면 어떤 시련도 의미 있는 것이 되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것이 된다.




여행 후, 나는 소희와 어긋난다. 그녀는 약혼한 그를 배신할 수 없었고, 나는 끝을 인정한다. 아니, 절망을 인정한다. 나는 내 속으로 깊이 들어와 버린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있다.


# 시간이 마모시키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진정한 사랑은 마모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한 고통도 진정한 슬픔도 진정한 기쁨도. 시간은 모든 거짓된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빛바래게 하고 그 중 진정한 것만을 남게 한다는 것을.


# 사랑이란 모든 보답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 이 세상의 모든 흘러 다니는 것 가운데 어떤 한 순간 한 지점에서 양방향으로 흐르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에요. 그러나 그것조차 대게는 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우리는 불평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지요. 아미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에너지를 어디에 쓰는 게 좋을까? 더 나을까? 의미가 있을까? 10년이 지나도 잘했다고 느낄까? 나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랑합니다.


고민한다고, 울부짖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두면 흘러가기 마련.

그것이 순리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뉴욕 뉴저지 뉴튼.

나는 그녀와의 마지막 안녕을 고한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그녀 옆에 바짝 다가왔지만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우리는 만날 수 없다. 이별한다.


그 곳에서 만난 마리너스 수사님. 나는 빅토리아메러디스호 수송선의 선장이었던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한국전쟁 당시 흥남 부두에서 한 임산부를 구하고, 그 배 안에서 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가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나라는 사실을 밝히게 된다. 나는 그와 대화하며 처음으로 위로받고 치유받는 듯한 감정을 느낀다.

신비(神祕), 때로는 이처럼 ‘신의 비밀’과도 같은 신기하고 오묘한 일이 삶에 감동을 주고, 또한 삶을 유연하게 한다.


개인의 삶은 공동체의 삶과 함께 한다. 개인의 사랑은 더 크게는 공동체의 사랑과 긴밀히 조응한다. 내가 만난 토마스 수사님, 마리너스 수사님은 미소만으로도 우리에게 신, 사랑, 운명에 대한 감동을 준다. 자신을 그대로 놓고, 즐거워하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항구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야함을 알게 된다.




10년이 지난 지금.


# 사랑해. 한 때는 그대의 삶과 나란히 가기를 원했던 나의 삶을 사랑하듯 사랑해. 그대와 나는 다시는 그 아름다룬 나날을 가지지 못하겠지.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은 그러나 10년 전에 이미 폭발하여 우주의 먼지로 사라졌으나 너무도 멀리 있는 바람에 아직도 우리에게는 별로 반짝이고 있는 저 별처럼, 아직 밤하늘에 있어.


기차역에서 나를 놓고 떠난 소희,

자신을 향해 달리다 문득 종탑의 종소리에 미련을 두던 나를 보고, 내 곁을 떠난 소희,

내가 자신을 미워하기를, 신을 더욱 더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소희,

이제는 이승에서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죽음을 앞둔 소희,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소희,


지금, 나는 너와의 만남을 접는다.


그러나,

다만 나는 너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퇴색되지 않았다. 그것은 진실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도 너는 그 곳에 있으니, 너는 그저 영원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가시지 않아요.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르는 거니까.


#사랑아, 언제까지나 거기 남아 있어라.